영화 <애니멀 킹덤> 리뷰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이 동물로 변하기 시작했고 혼란은 점점 커진다. 이 원인도 알 수 없는 바이러스는 이웃, 친구, 가족에게 점점 나와 가까워지며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고 일상을 무너뜨린다.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세상의 혼란을 담은 영화 <애니멀 킹덤>은 1월 22일 개봉했다. 제76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에 선정되었으며 제49회 사제르 영화제 5관왕을 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와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혐오하기는 쉽지만 사랑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드는 영화였다.
프랑스 전역에 원인 모를 변이 바이러스가 퍼졌고, 감염자는 동물의 모습을 한 수인이 되어 격리되거나 사살된다. 에밀의 어머니 또한 수인화를 겪어 보호소에 격리 중이다. 에밀의 아버지인 프랑수아는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는 않다. 보호소로 가는 엄마로 인해 이사를 가는 것도, 의미 없는 것에 희망을 가지는 것도 못마땅하다. 이사를 하며 학교를 옮기게 된 에밀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변화를 맞이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차츰 닥쳐오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에밀은 조금씩 튀어나오는 동물의 발톱과 도드라지는 뼈와 같은 신체적 변화에 손톱을 뽑고 등의 뼈, 수북이 피어나는 털을 감추는 등 현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조금씩 몸이 변화하고 야생의 본능이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감출 수 없는 야생성과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에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절망적인 순간에 매몰되지 않는 건 인간의 본능이 점차 사라지고 동물의 본능이 조금씩 에밀의 일부를 차지해서일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조류 수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점차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 간다.
에밀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특히 수인에 대한 시선이었다. 누군가는 수인을 괴물이라 불렀으며 누군가는 수인이 된 가족을 숨겼으며 누군가는 모르는 척했다. 물론 정부 당국은 수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격동의 사춘기를 겪는 에밀은 통보식으로 전하는 아빠의 말을 따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인이 된 엄마는 소통도 되지 않고 예전과 명확하게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아빠가 수인이 된 엄마에게 희망을 거는 것도 무의미하고, 의사가 아버지에게 괜히 희망을 불어넣는 일도 못마땅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의 몸이 동물로 변화를 느낀다. 수인 사회에 대한 냉담한 시선과 차별을 간접적으로 느꼈기에 자신의 존재를 거부했지만 거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에밀이 변화를 느꼈다고 해서 이것이 온전한 이해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자신이 직접적으로 그 상황에 닥쳤고, 인간과 수인의 경계에 놓여 있던 에밀의 인간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의 생각을 가지기도 전에 동물의 본능이 그를 점차 지배하고 수인의 경계에 다가선다. 이때, 새의 날갯짓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영화 초반에도 나왔던 새 수인이 중반부에도 나온다. 그의 이름은 픽스로, 정부에 의해 얼굴 변형이 되었고 그 상처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였다. 그는 몸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폭력으로 혼란을 겪었고 탈출한 후에는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날갯짓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러 차례 실패하지만 에밀의 도움으로 날갯짓을 성공하게 된 픽스는 에밀을 끝까지 도와준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면서도 동물 사이에서 배척될지 모를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는 인간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선 수인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도 다뤘다면 더욱 흥미로웠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기시감이 나를 덮쳐왔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들이 상황은 다르지만 익숙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영화는 공존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간과 동물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인간은 자본과의 경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동물은 야생에서의 생존 자체가 본능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영화에서는 특히 공존을 어렵게 만들고 그들을 분리한다. 동물과 사람 간의 소통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적인 사고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시작부터 씹는 소리가 들려온다. 왠지 강아지가 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이 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두 가지가 겹쳐서 들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에밀과 강아지가 과자를 나눠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인간과 동물 사이를 구분 짓는 차이는 소통의 부재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동물로 변하기 시작하는 수인과의 소통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이해와 대화의 부재는 갈등을 증폭시키고 혐오와 두려움을 남기며 공존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때도, 극단적인 정치 행위와 대립이 일어날 때도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이 세상에 펼쳐진 모든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영화 속에서 조금의 가능성을 본 장면이 있다면 프랑수아가 수인의 경계심을 푸는 장면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게 되는 구간인만큼 더욱 아쉽게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을 보며 혹시라도 계속해서 이어질 장면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 더 나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이 영화에는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두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호함은 관객에게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일부 관객들은 이를 이야기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회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태초로 돌아가려는 본능에 의해서 변하게 된 것인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어떤 계시인 건지 확답을 내릴 수 없기에 아쉬움을 남는다.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 감염자들의 공통된 특징을 연구하거나 분석하는 대신에 수인들을 격리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공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간은 다른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공존이라는 선택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영화 속의 인간들은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기를 이용해 그들을 제압한다.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배척은 혐오로 이어지며 인간은 모든 공간을 확보하고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공격한다. 공존해야 한다는 극소수의 의견은 배척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에 묻혀 공존이라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다. 이와 다른 상황이지만 비슷한 사회 속의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