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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순응하는 이가 바랐던 정상성의 허상.

영화 <순응자> 리뷰

by 민드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70년작 <순응자>는 파시즘 체제에 순응하려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의 광기와 정상성을 갈망하며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개인의 비극을 정밀하게 해부한 영화다. 특히 시각적 미학과 비선형적 서사 구조, 심도 깊은 심리 묘사는 후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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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1938년 파시스트 체제 하의 이탈리아. 마르첼로는 평범한 삶을 갈망하며 파시스트 정권에 몸을 담는다. 그는 당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대학 시절 은사이자 반파시스트 지식인인 콰드리 교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임무 수행 중 콰드리 교수의 아내 안나를 만나면서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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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을 위하여.


그는 파시스트 정권의 비밀경찰이다. 그는 정상성과 평범함이라는 것에 집착한다. 친구의 "다들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 하는데, 자네는 남들과 같아지길 원하는군"이라는 대사처럼 파시즘을 찬양한다기보다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범주 안에 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마르첼로가 이토록 정상성에 매달리는 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동성 어른으로부터의 추행과 살인사건,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그로 하여금 '비정상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정상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파시즘이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만큼, 마르첼로는 사회의 주류 가치와 이념에 철저히 순응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집단인 파시스트 정권에 소속됨으로써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이념적 명분 아래 자신의 비정상성은 감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르첼로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파시즘이 가진 허상 속에서 길을 잃고, 껍데기뿐인 '정상성'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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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 순응, 순종, 욕망


마르첼로가 추구하는 '정상성'은 주로 사회적 규범과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해당했다. 그의 와이프 줄리아는 이러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온순하고, 사회적 통념에 순응하며, 남편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려 노력하는 아주 순종적인 여성이었다. 마르첼로가 갈망하던 평범함과 안정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콰드리 교수의 와이프인 안나를 만나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안나는 줄리아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지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지식인인 콰드리 교수의 아내라는 점은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존재였지만 자신이 억압해 왔던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다. 발레는 혹독한 훈련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몸을 통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자기표현의 예술이며, 이는 파시즘의 억압 속에서도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안나와 같았다. 발레리나는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추어야 하듯 안나는 매혹적인 외면 속에 확고한 신념과 강한 의지를 품고 있다. 그녀는 그를 경멸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관계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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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와 독일


선전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만남이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괴벨스가 말한 무슬리니의 프러시아적 관점, 히틀러의 라틴적 관점이 만나 반의회주의와 반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혁명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솔리니의 파시즘이 가진 질서, 규율, 국가 중심주의, 군국주의적 특성과 히틀러의 나치즘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강인함을 기반으로 극단적인 인종주의를 표방했다. 선동적이고 감정적인 대중 동원 능력을 통해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이는 '라틴적 관점'에 비유되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능한 특성을 반영한다.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낡고 비효율적인 체제로 규정하고, 이를 전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강압적인 전체주의 통치와 일당 독재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며, 이를 '혁명'이라 포장했다.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억압하고 집단과 국가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폭력적인 사상이었음에도 유럽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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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와 플라톤


파시스트 정권은 현실을 왜곡하고 대중들을 기만했다. 영화 속 콰드리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 빗대어 말한다. 평생 목과 발목이 쇠사슬로 묶인 채 살아온 사람들을 '죄수'로 칭한다. 그들은 굴의 텅 빈 외벽이 보이는 안쪽 벽 앞에 서있고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림자와 소리만이 그들이 보고 듣는 전부이다. 반면, 죄수들의 뒤편에서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두고 그림자놀이를 한다. 죄수들이 보는 그림자의 정체이다. 이처럼 우리가 보는 현상의 세계는 동굴 안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현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보아야 하는데, 그 태양은 선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만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다. 이데아에 세계에 도달한 이는 사람들을 참된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현실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처럼 파시스트 정권은 마치 동굴 안의 그림자처럼 대중에게 왜곡된 현실을 보여주며, 진실을 은폐하고 자유로운 비판적 사고를 억압해 왔다. 콰드리 교수는 그러한 현실을 깨닫고,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마르첼로가 창문을 닫자 마르첼로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플라톤의 우화에서 죄수들이 벽의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는 것처럼, 마르첼로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그림자'를 외면하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려 한다. 창문을 닫아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그가 동굴 밖의 실체를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에 갇히려는 것이다.


(동굴 안의 죄수 : 국민, 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 파시스트 정권이 조작하고 통제하는 정보, 조작, 선전을 통한 왜곡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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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체제에 저항하는 이의 모습이 아닌 순응하는 자의 모습을 비춘다. 마르첼로에 대한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왔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전체주의는 '순응'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안정'과 '정상성'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철저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는 그들을 지독하게 따라다니며 한순간에 상황이 바뀌고 마는 허상이 얼마나 위태롭고 무상한 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추어야 할 생각과 욕망은 광기 어린 모습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정상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고 개인의 다양성이나 고유성을 억압할 때, 오히려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거의 끝이라고 할 만큼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임에도 순응한 자에게는 객관적인 상황을 보지 못한다. 체제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또 다른 희생을 삼아 살아남으려는 모습이 자기 파괴적이다. <순응자>는 그 불편한 진실을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파고들며 당신은 동굴에 갇혀 그림자 속의 안온함을 선택할 것이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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