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램지의 영화 <쥐잡이꾼 Ratcatcher> 리뷰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영화의 시선은 죽음 그 자체보다는 남겨진 소년과 그의 주변에 머문다. 음울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쥐잡이>은 린램지 감독의 1999년 작품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 앞에서 소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소년이 탔던 그 버스와 친구가 떠났던 그 강가라는 공간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1970년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로 인해 세입자들은 쫓길 위기에 처하고 환경미화원들은 파업을 해 도시 곳곳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쥐가 들끓는다. 엄마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던 라이언은 친구 제임스를 발견하곤 곧장 딴 길로 새 하천에서 같이 논다. 라이언은 제임스를 하천물에 빠뜨리고 즐거워하는데, 그에 화가 난 제임스는 라이언을 물에 밀쳐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라이언이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친구가 죽은 후 제임스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빠진다.
글래스고 도시는 쓰레기와 쥐가 들끓는 공간으로, 영화는 그 모습을 통해 도시의 무질서와 인간성의 소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도시의 쥐의 존재는 더러운 존재이자 끊이지 않는 가난의 상징이다. 면, 친구 케니는 햄스터 같은 작은 동물을 사랑하고 돌보지만, 그로 인해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영화 속 장면에서 케니는 생쥐가 하늘로 날 수 있다고 믿으며 풍선에 매달아 내보낸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현실과 다르길 바라는 희망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제임스가 현실을 알려주면서 케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며 변화를 맞이한다.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이지만 주변에 물들기가 사실상 어려운 환경이었다. 동물을 좋아한다던 케니가 쓰레기 속에서 쥐를 잡는 모습이나 쥐를 던지며 '놀이' 하는 모습은 은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도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혼자 가지고 있던 비밀이 더 이상 비밀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했다.
두 딸들에겐 다정한 아버지이지만 제임스에게는 한없이 냉혹하다. 제임스의 행동은 친구가 죽었다는 죄책감에서도 있지만 아버지의 폭력성과 언어를 그대로 보고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수라도 할라치면 쏟아지는 폭언, 술에 취해 돌아왔을 때 피해야만 하는 긴장감이 제임스를 채웠다. 더욱 예민하고 불안하게. 제임스가 겪는 죄책감과 고립감,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는 가정 내에서 채워주지 않는 불안정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희망을 꿈꿀 때마다 제임스의 마음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힘도 가진 존재였다. 제임스만이 이런 가정 문제를 겪는 것이 아니다. 마가렛의 부모님 또한 그녀에게 너무나도 무관심해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지속적으로 또래 소년들에게 성적 폭력을 당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성매수와 같은 행위로 비쳐 더욱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다. 실제로 마가렛 자신도 이것이 어떤 행위인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사회와 가정이 무관심하게 방치한 이들이 어떻게 고립되고 고통받는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천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제임스의 친구 라이언이 죽은 곳이며 소년들이 마가렛의 안경을 빠뜨리는 곳이며 케니가 하천에 빠진 것을 구해 용감한 시민상을 받게 되는 그런 곳이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자신만의 어두운 비밀을 감췄으며 이전과는 다른 상실감과 좌절감, 심지어 죄책감이 남아있다. 그곳에서 동네 소년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마가렛 앤을 만나게 된다. 하천의 두려움 때문에 괴롭힘 당하는 그녀를 구해주지는 못했다는 미안함이 있지만 동병상련을 느껴 그녀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구에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제임스는 마가렛에게서 위로를 받고 웃을 수 있었다.
제임스는 버스를 타고 자신이 살던 도시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간다. 버스의 종점에서 마주한 풍경은 마치 환상 속의 낙원처럼 드넓고 아름답다.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는 창 밖 풍경이었다. 그가 명확하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알겠다. 눈앞의 풍경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희망과 열망으로 '새로움'을 꿈꾸었다는 것.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소년이 기대했던 풍경은 상영 내내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오히려 그의 절망을 실감하고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절망은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가난에 찌든 도시 글래스고는 소음과 폭력, 범죄로 가득하지만 그 누구도 통제하려 들지 않아 엉망이 되어버렸다. 국가는 ‘주거환경조사’라는 이름으로 형식적인 정책만 내놓을 뿐,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도시에 내려앉은 무기력함과 절망감은 소년의 내면으로 이어진다. 죽음을 둘러싼 죄책감과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무력감은 이 도시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그를 붙든다. 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뉴스를 보면 현실이 그를 덮친다. 소년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은 죄책감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무력한 죄책감이 도시가 품고 있던 절망과 다르지 않았지만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