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르테노페> 리뷰
2025년 9월 24일 개봉한 영화 <파르테노페>는 나폴리의 상징이자 수호신인 파르테노페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때, 파르테노페는 그리스로마신화 속 세이렌들 중 하나로 처녀의 목소리를 뜻한다. 나폴리라는 도시에 대한 미스터리함과 자유, 욕망,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본질을 '파르테노페'의 삶에 투영하여 해석한다. 하지만 이 황홀한 비주얼과 거장의 야심으로 빚어진 이 작품은 아쉬운 평가를 받고 있다. 본 리뷰에서는 <파르테노페>가 나폴리의 상징을 여성 서사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성취한 미학적 성과를 조명함과 동시에 영화가 기존 소렌티노 스타일의 자기 복제에 머물렀다는 비판과 파편화된 서사가 어떤 아쉬움을 남겼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파르테노페는 나폴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 아름다움과 젊음을 만끽하는 파르테노페는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는 사랑을 즐긴다. 그녀는 '당신만의 여자'가 아닌 '모두의 여자'가 되는 것 같았다. 파르테노페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며 뛰어난 성적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항상 가려진다. 주변 사람들은 항상 그녀의 외모를 예찬할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르테노페의 화려했던 젊음이 조금씩 꺼져가기 시작한다.
영화 <파르테노페>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 특유의 감각적이고 시적인 미장센이 극에 달한 작품이다.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그 풍경뿐만 아니라 그 도시가 파르테노페의 삶과 감정을 어떻게 투영하는지를 보여준다. 나폴리의 바다, 좁은 골목길과 건물들을 그림처럼 표현하고, 그 아름다운 풍경에서 청춘을 즐기고 있는 파르테노페를 현실에 없는 것 같은 존재처럼 담아낸다. 또한, 영화에서는 파르테노페를 향한 주변 인물들의 욕망을 포착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권력인 동시에 그녀의 족쇄가 된다. 지식을 향한 열망과 화려함의 욕망 사이에서 그녀를 흔들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딜레마가 된다. 무엇보다 이 감독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감각적인 음악은 이 영화를 더욱 시적이고 감각적이게 만든다.
영화는 황홀한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과 공허함, 심지어는 허무함까지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즉흥적이고 파티와 예술을 즐기는 나폴리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라이문도와 같은 인물들은 이곳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우울한 티를 내려하지 않는다. 배우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그러한 본질을 회피하려 한다. 이는 화려한 삶이 영원하지 않으며, 근본적인 공허함을 덮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나폴리는 죄책감을 일으키고 행복할 수 없으며 천박한 도시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포함되지만 서로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는 '매몰된 공동체'이며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낭만을 강조할수록 쓸쓸한 공허가 배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시의 본질은 훼손된 동상들을 통해 비춰진다. 입부분이 없거나 얼굴 반쪽이 없는 동상 등 다양한 훼손된 동상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 나폴리라는 도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곧 정체성이 상실되고 완벽함이 붕괴되며 과거에 머문 아름다운 도시의 현주소를 나타낸다. 상실과 좌절로 매몰되어 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이 침묵하는 동상들이 대변한다.
파르테노페가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는 그녀의 본질(세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지적 욕구)과는 거리가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즐기고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배우는 자신을 잃고 맡은 역할에 몰입하여 타인의 삶과 감정을 재현해야 하기에 그녀의 자유를 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르테노페는 무엇보다 세상의 답과 진실을 찾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인류학자에 더 자질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에는 유효기간이 있으며 아름다움만으로는 배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그녀가 가진 능력 중 하나일 뿐, 그녀가 원하던 영속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파르테노페가 안정적인 사랑을 만끽하지 못하고 자유로운 연애만을 추구했던 것은 실은 영원하지 않은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많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모두의 욕망이 투사된 대상이 되었기에, 진지한 관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자신을 전부 내보이고 취약한 모습을 공유해야 하는 영속적인 사랑은, 완벽한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그녀에게는 부담스럽고 구속적인 것이었다. 영화가 지속적으로 투영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바라봐주길 바랐던 고독한 세이렌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관습과 욕망의 시선에 무심했던 파르테노페는 학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시위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은 그녀가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관찰해야 할 현실세계, 즉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 시위의 혼돈과 고통을 주체적으로 느끼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녀는 세상의 관습에 쫓겨 도망쳐왔지만 이제는 마주하려 한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와 자유를 위해 임신을 포기했지만 교수가 된 후 배가 부른 몸으로 시험을 치러 온 학생에게 만점을 준 일화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유급 후 출산으로 학업에 돌아오지 못할 염려에서 준 점수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독특한 점수 계산에는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임신 자체가 가장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인류학적 경험이라 할 수 있으며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인류학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던 학자로서의 여정이 마침내 자기 자신의 과거 선택과 가치관까지도 포용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깊게 새겨진 상처를 원상태로 복구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과거에 거부했던 모성과 삶의 방식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인간 본질'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이다. 타인의 삶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인류학적 관찰의 근본이자 본질임을 직접 증명한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새로운 철학적 깊이나 정서적 울림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기존 영화에서 기대했던 미학적 충격을 느끼지 못했으며 '자기 복제'의 형식으로 매몰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파르테노페는 '나폴리', '신화', '세이렌', '영원한 여성' 등 너무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생생한 입체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철학을 대변하는 도구처럼 느껴진다. 또한 실제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반영하거나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관객이 그녀의 외모에만 주목했던 극 중 인물들처럼 관객 역시 그녀의 내면보다는 화려한 외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또한, 영화는 파르테노페의 일생을 여러 시기로 나누어 보여주지만 이 에피소드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그녀의 외모가 화려하다는 것은 알지만 나폴리에 은유된다는 것을 모르는 관객들은 그녀의 내면적 고뇌나 성장의 동기를 쉽게 따라가기 어렵다.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인물의 고독을 보여주는 방식은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며 감정적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