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이 된 사랑, 눅눅한 자리에 남은 가정이라는 이름

영화 <만약에 우리> 리뷰

by 민드레


"만약에 그때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날 붙잡았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2018년 전세계를 울렸던 <먼 훗날 우리>가 2025년의 마지막 날, <만약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2025년 12월 31일 개봉한 이 영화는 뜨겁게 사랑했던 두 남녀가 10년 뒤 비행기에서 재회하며 던지는 "만약에"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따라간다. 원작과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이 리메이크 작이 현지화가 잘되었는지, 어떻게 각색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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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뜨겁게 사랑했던 두 남녀가 10년 뒤, 비행기에서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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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추억이 감정의 깊이를 다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만나면 다시는 함께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새도 없이 지금의 ‘우리’를 마주하기로 했다. 그들에겐 각자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은호는 게임 개발에 성공해 100억을 벌겠다 다짐했고, 정원은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과 함께 '건축일'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원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꿈 대신 사회복지 전형을 택했고, 뒤늦게 편입을 준비하며 고군분투한다. 은호는 그런 정원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정원은 은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매번 "괜찮다"며 홀로 짐을 짊어지곤 했다. 그러던 중, 은호의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두 사람의 삶은 더 팍팍해졌고 애틋하던 두사람은 지치다 못해 소홀해졌다. (은호가 더.) 은호는 찌질해졌고 정원은 햇살에 드리운 어둠을 피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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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햇살을 안겨주던 너는 이제 없다.


두 사람이 이별 후에 전혀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정원에게 은호와 은호의 아버지는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공간의 안정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의 안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은호가 정원의 안식처인 줄 알았으나 현실의 파고 속에서 결국 정원이 은호의 보금자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손바닥만한 햇살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던 은호의 약속과는 다르게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정원은 햇살에 드리운 어둠을 피해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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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괜찮을 수 있을까.


원작의 상징이 되었던 '눈'은 포근하면서 시린 의미를 담고있는 반면, 한국판에서는 청춘과 서러움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비'라는 소재를 택한다. 이 선택은 영화의 온도차를 극명하게 만든다. 눈이 주는 낭만은 비에 씻겨내려갔고 그 자리엔 청춘을 눅눅하게 적시는 현실의 습기가 채워진다. 공간의 변화 역시 처절하다. 한 뼘 햇살이 들던 고시원에서 햇살 가득한 옥탑방으로, 그리고 결국 어둠에 잠식된 반지하로 내려가는 주거의 하강은 어쩔 수 없는 침수를 보여준다. 자존감과 자존심 그리고 사랑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햇살 전부를 주겠다던 은호가 어둠에 잠식되어 정원까지 끌어당기는 모습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서로를 통해 일어날 수 없기에 헤어져야 했던 이들의 필연적인 비극을 예고한다. 사랑에 대한 헌신보다 생존의 비애가 앞서는 한국 청년들의 현실 속에서, 은호의 찌질함은 자책이 되고 정원의 밝음은 희망고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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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다한 사랑


비에 젖은 운동화, 습기 가득한 반지하 곰팡이는 한국 청춘들이 느끼는 경제적 압박과 심리적 위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은호가 어둠에 잠식될 때 정원까지 감정적으로 전이되는 '장소'가 된다. 늘 선풍기방향을 정원에게 돌려주었던 그때와는 다른 '지친' 마음은 습기를 이겨낼 여유가 사라진 관계의 끝을 보여준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을 위해서. 햇살 한 뼘(고시원) → 햇살 가득(옥탑방) → 어둠(반지하)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변화는, 성공을 향해 가려다 오히려 추락해버린 은호의 자존감과 비례하며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정원은 은호를 떠났고, 은호는 떠나는 정원을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겐 '가정'이 의미가 없었다. 지나간 시절엔 이미 우리가 없기에. "만약 그때 용기를 내서 지하철을 탔다면, 나는 평생 너와 함께 했을 거야" 라는 가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인 것이다. 상대방 쪽으로 선풍기 머리조차 돌려주지 않게 된 여유잃은 마음은 기간이 다한 사랑이었다. 이렇게 사랑할 새도 없이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과연 '가능한' 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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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별을 선택한 두사람 사이에는 가정과 같은 후회와 미련이 번갈아 생겨났다. 영화는 환경이 그들을 억지로 갈라놓은 듯한 느낌을 주며 관객을 더 큰 슬픔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결국 진정한 이별을 통해 무채색이었던 화면에 다시 색채를 피워냈다. 원작의 "I miss you"가 "내가 너를 그리워했다"와 "우리가 기회를 놓쳤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대사인만큼 이번 작품도 가정과 후회를 반복하며 결국 '지금의 나'를 찾는 과정을 잘 그려낸 듯하다. 원작의 샤오샤오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흔들리는 꽃 같았다면, <만약에 우리>의 정원은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햇살에 드리운 어둠을 피해 떠날 줄 아는"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은호의 찌질함을 단순히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잘 이별하기'를 선택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특히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랑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2025년의 관객들에게 더욱 자연스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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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배우의 열연이 단연 눈에 띈다. 구교환은 장난스러우면서도 찌질하고, 미워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로 자격지심에 빠진 은호를 완벽히 소화했다. 반면, 문가영은 현실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정원에게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사랑은 충만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원작 영화는 남자의 시선에서 그려지다 보니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적게 나와 아쉬움이 컸는데, 한국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굉장히 신경 쓴 것 같다. 아버지의 서사를 줄이고 로맨스에 집중한 연출은 전형적인 한국 로맨스처럼 보여 원작 특유의 로맨스와는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원작보다 감성은 덜할지 모르나 사랑조차 사치인 한국 청년의 모습을 잘 보여준 영화였다. 두 사람의 의지보다 환경과 상황이 그들을 억지로 떼어놓는 듯한 느낌은 처절하면서도 슬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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