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리뷰
하늘 위에는 전설적인 성의 환상이 흐르지만,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위에는 차가운 철과 자욱한 석탄의 먼지가 뒤덮여있다.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를 알린,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훌륭한 걸작이다.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낙원, 누군가에게는 정복해야 할 보물창고인 이 전설의 성은 비행석이라는 신비로운 에너지를 동력 삼아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야기는 한 소녀가 소년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시작된다. 비행선에서 떨어진 시타, 그리고 그 소녀를 받아낸 소년 파즈가 그렇게 만났다. 광산의 검은 연기 속에서 살던 파즈에게 푸른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품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시타는 마치 천사 같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운명 같은 만남은 자연스레 '라퓨타'라는 전설의 섬으로 시선이 옮겨가고 서로의 현실이 되었다. 파즈는 평생을 부정당했던 아버지가 발견한 라퓨타 섬을 마주할 수 있다는 기쁨과 시타를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시타와 함께하기로 한다.
이 신비로운 만남의 배경에는 기묘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쇠퇴로 인류는 증기기관과 프로펠러의 시대로 회귀한다. 그전, 하늘은 천공의 성들과 비행선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높은 과학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천공과 대지에 있던 국가를 제압한 거대 제국인 '라퓨타'는 전설로 남았다. 공중도시 문명이 사라진 현대에 유일하게 남은 부유성이며,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이기에 실제 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라퓨타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열쇠인 비행석을 가지고 있는 시타를 가두게 된다. 하지만 해적의 침략으로 시타가 파즈가 살고 있는 광산촌 슬랙계곡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시타가 파즈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라퓨타 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상은 기술의 쇠퇴와 문명의 어려움으로 고도의 문명의 과학 기술을 확보하여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야욕이 숨겨져 있었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선진국이 미개척지를 개발하고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침략을 정당화했던 논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담긴 비행석은 누가 이용하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도시 하나를 증발시키는 파괴력을 가진 '핵'으로 비유되어 권력의 도구로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기술의 비극은 라퓨타의 로봇 병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충직하게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요새를 불태우는 학살의 병기가 되었다가도, 인간이 없는 천공의 섬에서는 새둥지를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로봇 병사는 그 자체로 악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기술은 인간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자체에는 죄가 없으나 그것을 소유한 인간이 누구인가에 따라 세상을 한순간에 멸망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라퓨타의 로봇이 인간의 지배 아래 무자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평화로운 자연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통해볼 수 있다. 이는 기술이 긍정적이나 중립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졌으나 인간의 욕망이나 권력욕에 의해 그 방향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술은 인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 힘을 잘못 사용하면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관계 역시 뜨거운 유대감 이면에 서사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모든 것을 내어서라도 서로를 지키는 그 마음이 깊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파즈는 '기사'로서 위기를 돌파하지만 쉽지 않으며, 열쇠를 쥔 시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지는 못한다. 시대의 한계일지도 모르나 지브리는 항상 여자주인공 캐릭터가 능동적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광산촌의 노동자 소년과 초고대 문명의 왕녀라는 신분적 차이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프레임 아래 평범하게 다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온 두 아이가 겪는 현실적인 벽과 고뇌를 조금 더 밀도 있게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면서도 그 순수한 사랑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두 아이가 함께 외치는 멸망의 '바루스'는 승리뿐만 아니라 자유를 선언하는 주문이 된다. 아버지가 꿈꿨던 환상이자 자신의 뿌리였던 왕국을 파괴함으로써 위협이자 이상이 될 수 있는 그 대상을 없애는 것이다. '함께' 살아남아 또 다른 세상을 꿈꿀 이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없애는 것을 감수하고도 파멸의 굴레를 끊어낸 순간이다. 그 선택은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각자가 살아온 세계에서 서로를 위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찬란한 비행의 낭만 뒤에는 영화가 다 설명하지 못한 차가운 현실이 성큼 다가와 있다. 제국주의의 탐욕, 핵의 공포, 그리고 진실을 가린 정부의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기술과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책임은 과거보다 더 못한 수준으로 쇠퇴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하늘의 성과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실이 대비된다. 그 길이 고통스럽고 어려울지라도 '살아간다'는 의미와 인간의 본연인 '흙'위를 밟는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파즈와 시타가 천공의 성을 파괴하는 순간은 환상의 세계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땅에 발을 딛고 순수한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은 그들이 떠나간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