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늘 우리 집 대문을 나서서 있는 왼쪽의 언덕길이 학교 가는 길이었다. 옆집도 우리 집만큼이나 잘 사는 집이었다. 그리고 IMF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은 잘 살았던 것 같다. 옆집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인데도 거의 키가 180이 넘을 정도로 훤칠하셨고, 인물도 무척 잘 생기셨다. 매일 새벽 등교하는 시간은 옆집 할아버지가 산책을 하는 시간이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언덕길에서 할아버지를 마주치곤 했는데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용돈을 5만 원씩 주셨다. 1999년, 2000년. 5만 원이 고등학생인 내게는 꽤 큰돈이었고, 엄마와 아빠는 매일 치킨장사를 하며 하루 몇만 원 벌기 위해 뼈 빠지게 고생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5만 원의 존재에 대해 엄마에게 얘기한 적이 없다. 당시 첫사랑과 연애 중이었고, 할아버지가 주신 5만 원은 고스란히 데이트 비용으로 나갔던 것 같다. 물론 학교에서 가끔, 아주 가끔 매점에서 먹고 싶은 걸 사 먹기도 했다.
고등학교 내내 학교에서 내 별명은 '빈대'였는데, 매점 갈 때 내 돈 주고 뭘 사 먹지는 않고 늘 친구들이 핫바 등 맛있는 걸 사 오면 빈대의 트레이드 마크인 '한 입만'을 외치던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하게 친구들은 매번 내게 '한입 아니 두 입 이상씩' 나눠주곤 했다.
얼마 전 엄마에게 옆집 할아버지가 주셨던 5만 원에 대해 고백했다. 그러자 엄마는 무척 큰 배신감을 느꼈다. 너는 그런 걸 말도 안 하면 어쩌냐고. 감사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데.라고 말이다. 물론 한 푼이 아쉽던 시기였던 만큼 내가 그 5만 원을 받아서 고스란히 엄마에게 드렸더라면 가정 살림에 꽤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기적이었던 나는 내가 잘 살고 보는 게 더 중요했다.
정말 하루살이처럼 하루 동안 팔았던 치킨으로 다섯 식구가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엄마에게 학교에서 꼭 필요한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하는 것조차 미안했고, 엄마는 혹여 내가 대학을 서울로 갈지 몰라 차곡차곡 돈을 모아 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엄마의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은 대학을 추천하셨고, 엄마 역시 대학에 꼭 진학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외삼촌이 있었기에 엄마까지 대학에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때 대학에 가지 못했던 걸 후회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엄마는 우리에게 본인이 경험한 것을 되돌려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를 시켰고, 지방에 살던 우리였고 돈도 없었지만 무조건 서울로 보내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생긴 5만 원이었다. 경제 교육을 받은 적도, 돈을 아끼는 법도, 돈을 모을 줄도 몰랐던 철부지 큰 딸인 나는 그 귀한 5만 원을 연애하는데 펑펑 써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돈만 차곡차곡 모아놓았다면 대학 갈 때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고등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배가 고파도 매점에 못 갈 정도였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못 먹어'라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해 있기보다는 당당하게 친구들에게 한 입을 요구했다. 대학에 와서는 엄마가 하루하루 버는 돈의 1만 원씩을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용돈으로 꼬박꼬박 받았고, 장애인이었던 아빠 앞으로 나오는 생활비 역시 내 월세로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고생하던 엄마와 아빠를 까맣게 잊고 독립의 자유를 누리며 대학 선배들에게 빌붙어 매일 부어라 마셔라 잘도 놀았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와 옆집 할아버지를 보면서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옆집 학생에게 5만 원씩 고민 없이 용돈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내가 원하는 모습과 정 반대다. 얼마 전까지도 명절에 큰집에 가면 큰 사촌오빠에게 용돈을 받았다. 하지만 조카들에게 용돈을 준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내가 받는 돈의 크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위주로 정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거나 가치 있는 일'은 월급을 그리 많이 받지 못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 빠듯할 정도의 돈을 벌었고, 그런 와중에 KTX를 타고 지방에 한 번 내려갔다 올 때면 차비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실제로 여유자금이 없기도 했지만 조카들에게 용돈을 턱턱 내어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제는 그런 여유가 생길 만도 한데,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나는 베푸는 것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야박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마음이 좀 넉넉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참으로 옹색스러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