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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Mirror Oct 12. 2021

금수저였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지역에서 꽤나 잘 나가던 사업가 집안이었다. 할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했고, 큰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할아버지가 일궈 놓은 사업으로 먹고살았다. 할아버지의 자녀들, 즉 내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7남매였고, 고모 두 분에 큰아버지 세 분 그리고 우리 아빠와 막내인 삼촌이 있었다.


지긋하게 나이 들어 가시는 할아버지를 늘 모시고 다니던 운전기사 아저씨가 있었고,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우리 집에는 살림을 봐주던 언니가 같이 살았다. 



어린 시절의 어느 어린이날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할아버지 별장에 모였다. 할아버지는 20명(혹은 그 이상) 가까이 되는 손주들을 위해 어린이날 선물로 보물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 사촌들은 모두 신이 나서 곳곳에 숨겨 놓은 보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화창한 봄날이었고, 찾아낸 보물은 각종 학용품 등 다양한 선물들로 바꿔 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끼던 별장은 산속에 있었는데 집 안쪽의 계단은 계곡과 연결되어 있었고, 집 앞 넓은 터에는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그 소나무를 팔라고 하실 정도로 장관을 이루는 멋진 소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다. 그 바위 위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우리끼리 살 수 있는 집을 한 채 사 주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그 집에 살았다. 우리가 이사 오게 되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아버지 가족과 넓은 마당이 있는 2층 집에 사셨다.


가족들은 이제 설, 추석 그리고 제사가 있을 때면 상동 큰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잘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IMF가 오기 전까지 꽤나 유복하게 지냈다. 입학식, 졸업식마다 가족들에게 온갖 선물을 받고, 때 되면 해외여행을 다닐 정도로 재력만큼은 어느 집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가 일구어 놓았던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였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집이 담보로 잡히면서 이미 우리 집의 절반 이상은 은행이 주인이었다. 회사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쳐서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우리 아빠를 위해 가족에게 주어지던 생활비 역시 끊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매달 월세를 받던 1층 가게 옆 작은 공간에서 치킨 장사를 시작했고, 1층 가게가 나가면서 보신탕, 찜닭 등도 함께 팔았다.



고등학생 두 명 딸과 중학생 아들 하나까지 아이 셋을 키우는데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치킨집을 시작한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마지막 배달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큰딸인 나는 자주 엄마와 마주 앉아서 치킨에 맥주 한 잔씩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IMF로 인해 생활비가 끊기기 전까지 회사에서 우리 가족 전체를 위한 생활비와 아빠 개인 용돈을 따로 주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중학교 졸업 전까지였으니 십여 년이란 꽤 오랜 시간 동안 할아버지 회사에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내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아빠는 꽤 오랜 시간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의식을 되찾았고, 깨어났으나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낙동강에서 친구들과 뗏목을 만들어 강을 타고 내려오는 등 모험심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아 무척 활발했던 아빠에게 신체적 장애가 생겨 부자유한 몸이 된 것이 아빠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오랜 시간 잘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아빠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내려놓고, 홀로 자유롭게 도보 여행을 갈 수도 있고, 한 달 이상 집을 비워도 될 정도로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경제적인 원조가 끊기자 다친 후부터 줄곧 있었던 아빠의 우울증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갔다. 돈을 못 벌어오는 가장에 대한 엄마의 원망, 그리고 제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는 가장으로서의 죄책감과 답답함. 그때는 나의 괴로움이 너무나 커서 아빠나 엄마의 상황이 전혀 와닿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엄마와 아빠야 말로 그 상황이 정말 지옥일 수 있겠구나 싶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가족들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 자유를 똑같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나라는 한 사람 몫은 제대로 하며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자유 정도는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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