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안개가 짙은들 산까지 지울 수야.
어둠이 짙은들 오는 아침까지 막을 수야.
안개와 어둠 속을 꿰뚫는 물소리, 새소리,
비바람 설친들 피는 꽃까지 막을 수야.
— 나태주, 〈안개가 짙은들〉
나태주 시인은 긴 세월을 살아오며 소박한 언어로 깊은 통찰을 건져 올립니다. 시 〈안개가 짙은들〉도 그렇습니다. 삶을 살다 보면 불시에 찾아오는 장애와 걸림돌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끼어드는 훼방꾼 같은 존재, 그것이 안개이고 어둠이며 비바람입니다.
하지만 안개도, 어둠도, 비바람도 모두 삶의 일부입니다. 없기를 바란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왜 하필 지금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느냐고 물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원망한다고 해서 걷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라고. 삶에는 끊임없이 길을 가로막는 순간이 있지만, 동시에 반드시 다가오는 시간도 있다는 것을요.
이 시에는 ‘~한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안개가 짙은들, 어둠이 짙은들, 비바람이 설친들. 그 모든 것은 삶을 흔들 수는 있어도 끝내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순간의 괴로움에 머무르지 말고, 다가올 변화를 믿으라는 격려처럼 들립니다.
그림책 《비 오는 날의 소풍》에 나오는 에르네스트 아저씨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원치 않은 상황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풍날, 아침부터 비가 쏟아집니다. 기대가 무너진 셀레스틴느가 울먹이자, 그는 말합니다.
“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을 가면 어떨까?”
뜻밖의 제안에 셀레스틴느의 눈이 반짝입니다. 그들은 밀짚모자와 비옷을 챙겨 입고, 비 내리는 숲으로 소풍을 갑니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립니다. 비는 여전히 내리지만, 그들의 하루를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고 할까요. 마침내 주변 사람의 마음까지 열며 하루가 따뜻하게 마무리됩니다.
삶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흔들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도 없고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불편하고 낯선 순간이, 어느새 선물로 바뀌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하니까요.
혹시 지금 안갯속을 걷고 있나요.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운가요. 그렇다면 잠시만 더 걸어가 보세요.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아침은 반드시 오며, 꽃은 비바람을 뚫고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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