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에서 로젠버그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선’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으로 본다는 그의 관점을 공유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눠 보면서 사람도 선과 악으로 구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을 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선과 악을 로젠버그처럼 바라보면 타인을 평가하는 대신 타인의 행동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게 된다.”(39~40쪽)
흔히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변수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좋은 일이 내일의 좋은 일이 되지 않고, 또 오늘의 불운이 내일의 불운을 부르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앞일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쉽사리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분명코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과 다를 겁니다. 오늘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바람은 어제의 바람과 다르고 내일의 바람과도 다를 테니까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붓다가 말한 무상(無常)의 이치입니다.
변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이거다,라고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모습, 다른 성질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아이스크림이 냉장고에서 나오는 순간 잠깐 사이에 녹아 흘러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은 변화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변화에 노출돼 살아갑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변화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합니다. 변화의 흐름은 짚어낼 순 있지만 정확히 예측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판단하려면 변하는 대상이나 현상을 멈춰 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판단하는 잣대가 이미 과거에 학습된 경험입니다. 따라서 판단한다는 것은 과거의 기준으로 변화무쌍한 현재를 재단하는 일인 셈입니다.
그래서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뿐더러 무모합니다. 그 대상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루도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판단이 곧 생각이니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 없이 산다는 뜻과 동의어입니다. 명상 세션을 진행할 때 판단을 멈추라는 말을 할 때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판단과 분별의 의미를 일러 줍니다. 예를 들어 독은 생명을 해치고 죽이는 물질이어서 가까이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은 판단입니다. 그런데 소량의 독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독은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됩니다. 생명을 죽이는 독이 살리는 약으로 변신하는 것이죠. 이것이 분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 대신 분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판단하기보다는 잠시 멈춰서 분별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와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선과 악의 잣대로 사람과 세상을 나눕니다. 그에 따라 타인은 적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속속들이 타인을 알지도 못한 채 선악 판단으로 인정사정없이 삶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변화 가능성의 싹을 잘라 버립니다. 무시무시하고 고약한 낙인찍기입니다.
그에 비해 세상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선악을 나누는 마셜 로젠버그의 관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판단보다는 분별에 가깝습니다. 편을 가르는 대신 세상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 자신과 상대가 현재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끔 자신과 상대에게 방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순 없지만 때때로 판단을 멈추고, 분별할 수 있다면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독이 되지 않고 약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게 무엇인지 발견하게 해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