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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Nov 12. 2023

주인을 잃은 커피머신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매일 아침, 상담실에 도착하면 노트북 전원을 켠다. 업무 메신저 로그인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나면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상담실에는 정수기도, 텀블러를 씻을만한 탕비실도 없다. 그렇기에 커피를 마시려면 아직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싸늘한 복도를 지나 건물 끝에 위치한 카페로 가야 한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날씨 탓인지 두꺼운 옷을 뚫고 찬기운이 스며든다. 상담실 불빛이 복도로 흘러나오지만 캄캄한 복도를 밝히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옷을 여민채, 종종걸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불을 밝힌다. 오늘 하루 이곳을 오고 갈 아이들을 생각하며 소박한 온기를 나눈다. 


 어느새 카페에 도착. 이곳 4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곳으로 학교 안의 공간이라 하기엔 믿기지가 않을 만큼 힙하다. 은은한 조명, 이케아의 아기자기한 액자와 소품으 꾸며진 카페는 어느 유럽의 카페를 연상시킨다. 매일 아침마다 들르는 곳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오랜 시간 싱크대  끝에서 잠자고 있는 커피머신에 눈길이 간다.




4년 전만 해도 이 공간에서 모든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녀석이다. 고급 세단차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외관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자동 그라인더가 내장되어 있는 커피머신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드르륵' 커피콩이 갈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어느새 은은한  향기가 가득해졌다. 비교적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과 황홀한 커피 향기에 취해 기분 좋게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부장님과 나는 출근 도장을 찍듯, 신나게 버튼을 누르곤 했다. 피곤한 하루의 시작을 맞이해 주는 커피머신이 고마웠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커피머신은 자주 고장이 났다. 어느 날, 고장 난 커피 머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장님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저것도 이제 시간이 지나 선생님들이 몇 번 바뀌고 나면 무용지물이 될걸요. 마치 주인을 잃은 물건처럼요."


 한해 한해 함께했던 선생님들이 바뀌고, 부장님도 명예퇴직을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30년 이상을 학교에 몸담고 계셨던 그분의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몇 번의 방학이 지나고 수도 없이 고장 났던 커피머신은 주인을 잃은 기계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나도 고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결국 누가 고쳐아할지 모른 채 그대로 방치되어 버렸다. 아라비카의 신선한 향을 간직했던 커피콩은 숨죽인 채 그라인더 안갇히고야 말았다. 커피머신이 선사했던 그윽한 커피 향기는 추억과 함께 잊혀갔다.  


나는 커피머신을 볼 때마다 슬프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커피의 인사가 사라져서 슬프다.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는 저를 보자니 속상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주인을 잃은 저 녀석이다. 주인을 잃은 커피머신은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주인이 있었더라면, 제 한 몸 돌봐줄 주인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고장이 날 지경까지 내버려 두었겠는가. 어느 누구도 고치려 하지도, 돌보려 하지 않는 저 녀석의 신세가 그저 안타깝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주인을 잃은 것들이 저뿐이겠는가. 학교 안에 널브러진 연필들, '제발 좀 찾아가 주세요' 아우성치는 분실물들, 주인을 잃은 불쌍한 강아지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주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해로운 음식으로 나를 해치기도 한다. 방치된 커피머신 그라인더에 남아있는 섞은 커피콩처럼 내 속에 해로운 음식을 내뱉지 못한 채 머금고 살아간다. 그리고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타인의 목소리에 맞춰 살아가기도 한다. 주인을 잃은 물건보다 더 슬픈 건 주인을 잃은 우리 자신 아닐까.


마흔이 된 나에게 필요한 건,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앞으로 남은 날들을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씩 노화되어 가는 몸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구분해야 한다. 분에 넘치는 일 속에 나를 혹사시키지 않고 내 몸을 건강히 돌봐야 한다. 또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내 감정과 내 뜻에 맞춰 삶을 재정비해야 한다. 마흔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나의 내면의 목소리보다 부모님,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갔던 날들 투성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저 좋다는 것에 휩쓸려 여과 없이 흡수하느라 물에 빠진 꼴이 되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던 모습은 어떠한가. 입시, 결혼, 자녀양육까지.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의 아이들 또한 세상에 맞는 기준에 맞춰 키우느라 정신없고, 그 틀에 맞지 않을 때는 아이들을 몰아세우기도 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세상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왔다면 마흔 이후의 삶은 흔들리더라도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싶다.  거짓자기(false self)에서 벗어나 참자기(true self)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살아가고 싶다. 마흔의 길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흔들리기보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일이다.


주인을 잃어 방치된 커피머신으로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몸과 마음을 잘 돌보면 좋겠다. 비록 낡은 나일지라도.


"당신은

나의 몸이 이야기하는 소리와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있나요?"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을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을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우리 나이면 웬만큼 살아본 거지?

이제 우리 나이면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허망함인지 구분할 줄 아는 나이

진실로 소중한지 무엇인지 마음 깊이 깨달아지는 나이.

 

남는 시간 동안 서로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마음 깊이 위로하며 공감하고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깨우쳐 알아지는 나이.

 

‘살아 숨 쉬는 오늘의 기적을 아낌없이

배려와 이해로 희망 가득

행복한 날 되시기를!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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