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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Dec 01. 2021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면....

with 그림책 <점. 피터 레이놀즈>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진다."

<다가오는 말들. 은유>



요 며칠 혼자서 끙끙 앓던 고민이 있다. 쓰고 싶은 욕구에서 일어난 결과물을 읽어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많아 망설여지는 시기가 왔다. 쓸수록 보이는 나의 경험의 한계, 지식의 한계, 알고 있는 어휘의 한계. 생각과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한없이 부족하다 느꼈다. 쓰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읽는 삶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내 마음 안에는 두 가지 상반된 욕구가 치열하게 자기 주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면의 혼돈은 시시각각 다짐하는 결심이 너무나도 상반되게 나타났다. 일례로 어제 마지막 글쓰기 수업에서 '약속'이란 주제가 글감으로 제시됐을 때였다. 머릿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글쓰기를 계속 하도록 나 자신에게 약속해야겠다.' 였다. 하지만 이 마음은 금새 또 변했다.


수업시간에...  이제까지 다른 분들이 쓴 글 중 마음에 와닿는 글을 낭독하였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낭독해주는 호사도, 민망함도 견뎌야하는 시간이었다. 딱 그럴 것 같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라는 노래가사도 있지 않던가. 내 글이 왠지 가장 마지막에 읽힐 것 같았다. 정말.... 예감대로 흘러갔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내가 쓴 글이 '별로다.'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안다. 자신의 경험과 삶에 가까이 와닿는 글이 있기 마련이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6명의 독자 마음도 사로잡지 못한 글을 썼구나.'라는 자괴감에 빠졌다.


학창시절이 끝남과 동시에 성적표 따윈 내 삶에서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매 순간,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알게 모르게 성적표가 존재한다. 타인의 시선,  브런치에서는 라이킷 수, 구독자 수.... 더불어 더 마음이 아픈 건, 스스로 내리는 '나 자신에 대한 혹독한 평가'..................  울고 싶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며 잠들기 전 <다가오는 말들. 은유> 책을 꺼내 읽었다.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그러면 쓰는 게 낫다.(은유 작가의 말)"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딱 내 마음이다. 글을 쓰면 나온 결과물이 맘에 안들어서 고통스럽고, 다른 사람의 평가도 고통스럽다. 내면의 아픔을 꺼내놓는 것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쓰고 싶은 '글감'과 '메모'가 여기저기 있다. 언제 내 이야기를 들려줄거냐며 아우성 친다.

이 두가지의 고통 속에 있다면 쓰는 게 낫다고? '글을 쓴다. vs 글을 읽는다.'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잠시 글쓰는 걸 멈추자였는데...... 쓰는게 낫다니. 오늘 내 마음은 도대체 냉탕, 온탕을 몇 번을 왔다갔다 하는거야.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즐거움'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림책 <점. 피터 레이놀즈 글 그림>에는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고 버팅기는 아이가 등장한다. 꼭 지금의 나를 닮았다. 그림을 못 그리겠다 팔짱을 낀 베티처럼, 한 글자도 못 쓰겠다 투정부리고 퍼질러 누웠다. 두려워하는 베티에게 선생님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보렴." 하고 말을 건넨다. 불끈! 베티는 화가 난 마음에 도화지에 힘껏 연필을 내리 꽂아 점을 하나 그린 후 "여기요!"라고 내민다. 이건 그림이 아니라고 나무랄 법도 한데 선생님은 베티의 그림을 가만히 감상한다. 다시 그리라고 혼낼 법도 한데 선생님은 이 작품에 이름을 쓰라고 하셨다. 액자에 담아 전시하였고 아이는 연필 점 하나 찍힌 그림보다는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기가 생긴 베티는 신이 나 형형색색의 멋진 점을 하나씩 그려갔다. 누나의 그림이 대단하다며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한 아이에게 베티는 "너도 할 수 있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을 소중히 감상하고, 작품으로 여기며 '이름'을 쓰도록 한다. 그림에 자신이 없던 아이가 한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만났다. 베티는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해준 선생님을 만나 '꼬마 화가'가 되었고, 또다른 아이에게 용기를 전해준다.


생각해보면 부족한 내게도 따뜻한 시선이 가득하다. "내가 너를 잘 알아. 잘하고 있어."라고 토닥여주는 고마운 존재가 내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아이처럼 내 마음이 맑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용기를 갖은 순간,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즐겁게 그려나간다. 스스로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무수히도 깊숙이 나 자신을 비판한다. 날선 시선을 보낸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실수할 수 있어. 아무도 할 수 없는 걸 네가 할 수 있어." 진심 가득 담아 따스한 말을 하면서도 말이다. 참 이율배반적인 어른이다. 비판 속에 즐거움이 숨어버렸다. 참으로 안타깝다.


어쩌면, 어른이 된 지금은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를 얻는 일보다 나 자신을 다독이는 일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안의 무수히 작고 초라한 '나'에게 누구보다 더 따스한 시선을 보내야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 큰 어른에게 끊임없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일은 드물지 않는가. 누군가의 인정보다는 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일. 누군가의 응원보다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보내는 응원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나를! 내가! 응원하기로 했다.

그냥 쓰기로 했다. 정녕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일단 써보기로 했다. 정녕 누군가의 마음에 와닿지 못하더라도 일단 써보기로 했다.

베티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쓸 수 있다는 즐거움'을 다시 내면에 초대하기로 했다.

"나 그냥 계속 써볼래요."

혼자서 소심하게 고백해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질과 재능을 누군가가 알아볼때

그 부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자신이 발견되고 동경을 받고 지배를 받길 갈망한다.

 하지만 왜 다른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왜 당신이 직접 그 여정을 항해하고

 탐험할 수 없는가?


-비로니카 투갈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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