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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나와서 필라테스 강사 하는데요?(2)

마지막화.

by 민듕쌤

우리 집은 아주 어린 시절, 그리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90년대 후반, 월 200만 원의 아버지 월급을 아끼고 아껴 어머니는 나와 오빠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지만 당시(1990년대) 우리 학교는 분기별로 120만 원이라는 학비를 받고 있었고, 그 외에도 특별활동이나 스카우트 활동 등 학교에 들어가는 돈이 상당했음에도 어머니는 우리 두 사람을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빠듯해진 생활비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서 돈을 아껴야 했다.


생일이면 '플레이랜드'와 같은 놀이공간을 통째로 빌려 생일파티를 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늘 집에서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피자를 먹고 미스터빈 비디오를 빌려보며 생일파티를 했다. 그래도 내 교우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는지 친구들이 많이 놀러 왔는데, 작은 집에서 먹을 것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생일 파티가 그리 재밌지는 않았을 것 같다. 친구들에게 미안했고 조금 부끄러웠지만 집안 사정을 잘 알기에 무리해서 놀이공간을 대여하자고 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면서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IMF에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한 아버지가 사업체를 차리면서 초반 2년 정도 회사가 아주 잘 나갔고, 우리 집은 꽤나 부유한 집이 되었다. 브랜드 옷을 입었고, 과외를 받았다. 사립과 공립의 차이가 그닥 없는 중학교에서 나는 부잣집 딸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사업이란 아주 잠깐의 영광만을 위한 것인 듯했다. 단 2년 만에 아버지의 사업은 급격한 하락세를 탔고, 집이 경매에 부쳐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우리는 아주 작은 사이즈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이것마저 경매에 넘어가고 나면 우리에겐 남는 자산이 한 푼도 없는 무일푼이 된다는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와중에 부모님 사이에선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아직 학생인 우리를 위해 별거나 이혼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 때문인 건지, 그냥 내 성격인 건지,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인지. 눈앞에 할 수 있는 일, 공부에만 몰입했다. 명문대에 진학하겠다는 목표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공부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중요치 않았고 그냥 눈앞의 목표만을 위해 살았다.



대학에만 가면...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친구들은 늘 좋았지만 그 외엔 모든 게 힘들었던 것 같다. 급식이 유명했던 학교 덕분에 점심시간은 행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 그저 공부만을 위해 사는 그 시간이 너무도 끔찍했다. 견디고 또 견뎠다. 그것이 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찬란한 대학생활이 펼쳐졌다. 아니, 그럴 거라는 건 공상일 뿐이었다.


공부만 해야 하는 그 시간이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지만 그곳에서 난 뭣도 아닌 사람이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현실을 즐기기엔 돈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


공부 스트레스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학교 시험기간만 되면 방대한 시험범위에 숨이 턱 막히며 제대로 된 밥 한술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3일 동안 우유만 먹으면서 버틴 적도 있을 만큼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만 가면 행복한 삶이 펼쳐질 거라고 믿는 풍조는 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소위 명문대를 나온 이들은 모두 행복을 손에 거머쥐었을까?


물론, 좋은 대학을 나왔기에 이런 글도 쓰고 사람들이 내 말을 경청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고마움도 있기는 하나 학교 졸업장이 내게 행복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눈앞에 놓인 기회를 하나씩 주워 담으며 살았고 직장에 들어가 드디어 금전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자기 파괴적 노력


요즘 어린 친구들을 보면 나의 20대와 너무도 꼭 닮아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원하는 게 뭔지 모른 채, 눈앞의 일에 몰두하며 진짜 자신을 잃어간다.


연애에서도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파괴적인 사랑을 하며 자신을 갉아먹는다.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탓하며 또 일에 집착을 한다. 하지만 정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을까? 그저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에 주어진 일을, 혹은 없는 일도 만들어서 바쁘게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얻어진 돈은 해외여행을 하고 명품을 사며 의미 없이 소비해 버린다.


결국 남는 건 화려한 경력과 불타버린 젊음뿐이다. 그 경력은 계속해서 그 분야에 남아야만 쓸모가 있는데, 즐겁지 않은 일이지만 경력이 아까워서 어떻게든 붙어있게 만드는 계륵이 되어버린다.



나는 만 4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 지나고 퇴사를 결심했다.


회사에 다녔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라고 권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한 뒤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단 한 가지, '조금이라도 더 어렸을 때 깨달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필라테스 강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 나는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기왕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왔으니 이제부턴 완전한 내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늘 타인에게 끌려다니던 삶은 단 한순간에 바뀌지 않았고 그 후에도 진짜 행복을 거머쥐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내 스스로 개척하고 선택하여 만든 행복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주어지지 않은, 하지만 내가 이뤄낸 행복.


나는 이 삶을 조금 더 사랑해주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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