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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퇴사하겠습니다.

9화.

by 민듕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믿었던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새로 온 상사에게 적응하느라 위궤양이 오고,

사고 수습하느라 몇 주씩 야근도 하고,

나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힘들고 위장이 아팠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이 짓을 끝낼 수 있겠지'하는 막연한 바람이 있을 뿐.


정작 나를 힘들 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연애실패는 직장생활까지 이어졌다.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었겠는가?


20대의 끝자락, 답답함에 자전거를 열심히 타러 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있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외모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게 그닥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각자의 삶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연애를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고 상대에게 맞춘 연애는 점차 내 피를 말려갔다.


나는 더욱 외로워지고 있었고 내 생일이 되었다.


그 사람은 온갖 핑계를 대며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속상함에 혼자 지방으로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집에서는 괴로워 미칠 것만 같아서였다.


"카톡"


하루종일 연락이 없던 그 사람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일저녁에 생일축하한다고 그만 만나자고 전하는 남자라니..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그 사람을 찾아갔다. 무슨 이별 방식이 그럴 수 있을까.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속만 끓고 있은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여자 동기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와 점심을 같이 먹었고

하루 전에도 아무렇지 않게 나와 웃으며 대화를 했던,

세상 밝고 예쁘고 어려움은 모를 것 같던 동기가,


본인상이라니.


부친상 아니고, 조부상 아니고, 본인상이란다.


공지가 잘못 올라온 게 아닌가 싶어 그 친구의 자리에 가 보지만, 역시나 자리에 없었다.


내가 알던 그 아이는 언제나 밝았고, 부족한 것 없는 유복한 집에서 귀하게 자랐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사내 남자친구 말로는 팀장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아니, 내가 보기엔 고작이 그녀에겐 아닐 수도 있었겠다. 혹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거나.



당시의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왜 사는지도 몰랐다.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거겠거니. 그러다 적당히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거지 뭐 하고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언젠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겠지.


만약 돈 많고 잘 나가는 남자와 결혼하면 이런 직장은 더 이상 안 다녀도 되겠지...


'언젠가'와 '만약'은 나를 파괴하는 길로 이끌었다. 언젠가 찾아올 행복과 만약에 일어날 행운을 위해 지금의 시간을 희생하는 삶. (아마 그녀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 게 인생이라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로 인해 내 가족을 행복하게 꾸려나갈 있다는 이유라도 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참았을까?


먹여 살려야 할 식솔도 없고 직장을 통해 꿈꾸는 삶도 없던 난 더 이상 남을 위해, 돈을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고 싶지 않아졌다.


('스물여섯에 5000만 원을 벌고 생긴 일'을 본다면 이즈음 내 연봉은 훨씬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연봉은 매년 3% 오른 것이 고작이고 회사 상황이 안 좋아지니 나오던 보너스마저 사라져 퇴사할 때의 수입은 입사당시보다 훨씬 줄어있었다.)



"자, 다들 알고 있겠지만 다음 달부터 세무조사가 시작된다. 조사가 진행되는 두 달 정도는 저녁과 주말에 개인일정 잡지 말고, 죽었다 생각하고 두 달은 회사에 반납해라."



그 친구의 일이 있고 꼭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어찌어찌 연마감을 해내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팀장님의 통보가 내려왔다.


'개인 일정을 잡지 말라니...'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지언정 나는 내 인생을 그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실무자 중에서도 가장 손이 빠르고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말 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이었으리라.


"민정.. 지금 우리는 민정 없인 안돼. 조금만 더 일해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조사로 바쁜데 우리 애들 인수인계까지 절대 못해.."


당시 난 퇴사를 결심한 직후 필라테스 강사 코스에 이미 등록을 끝낸 상태였다.


총 5개월 정도의 코스, 그중 1회 차 등록금인 350만 원을 이미 모두 납부한 상태. 취소 시 70만 원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이제는 취소가 안 돼서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줄게. 어떻게 안될까?"


동료들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약해진 난 방법을 알아보았고, 오전반에서 오후반으로 변경해 5시 칼퇴근 후 필라테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준비된 퇴사.


아마 모두가 나처럼 세무조사를 받지 않고 퇴사를 하고 싶었을 거다. 실제로도 세무조사 이후 우리 파트원 5명 중 4명이 퇴사를 했다. 그만큼 세무조사는 경영관리, 특히 간접비를 담당하는 경리담당 직원들에게 극악무도한 스트레스와 엄청난 업무강도를 안겨준다.


"내일 오후까지 교제비 5년 치 내역 전부 뽑아주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 이어지니까.


하지만 난 이즈음 퇴사하면 뭘 해야겠다는 플랜이 머릿속에 있었다. 건드리면 바로 터지는, 안전핀 뽑은 수류탄을 들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세무조사와 팀장의 한마디는 손에 꼬옥 쥐고 있던 수류탄을 던지게 만들었다.




앞선 이야기 "필라테스 강사 안 해볼래요?"에서만 해도 난 몸매에 자신도 없고 체력도 저질인 그저 그런 못난이 직장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타고난 운동신경에 더불어 직장생활 내내 사이클, 달리기, 클라이밍, 필라테스, 요가, 서핑 등의 운동으로 몸을 다지는 사이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다부진 등짝,

동글동글 업된 예쁜 엉덩이,

하루 4시간씩 운동할 수 있는 체력.


아무리 피곤해도 최소 주 3회 이상 운동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 어느덧 쌓여 필라테스 강사 코스를 듣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운동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그즈음 되니 '강사를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처음 강사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 같은 게 무슨 필라테스 강사야..'라는 생각을 했지만 꾸준한 자기 관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퇴사와 직업 전환을 결심한 즉시 다이어트에 들어갔고 취업할 때 쓸 프로필 사진을 단 7주 만에 찍어냈다.


직장 다니면서 찍었던 바디프로필 사진 (지금은 이때보다 근육량이 2킬로는 늘었다.)


그렇게 난, 나이 서른에 필라테스강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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