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큰아들입니다.
직접 대화로 말씀을 드릴 용기가 없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지난 주말에 찾아뵙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아버지께서 불과 몇 달 전 첫번째 항암치료를 마치고 암 크기가 줄어서 안도하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저도 생생한데요.
난데없지만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합니다.
평화롭게 지내던 왕국에 예고 없이 적이 깊숙이 쳐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동시에 말이죠.
왕은 모든 병력을 끌고 정해놓은 전장에서 결전을 치를지, 마지막 보루인 수도성에서 수성전을 하며 버틸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전을 선택하고 패배했을 경우 당장 감당해야 할 결과가 너무 염려되어 지원군을 기대하며 수성전을 선택했습니다.
1차 수성전은 사령관의 지휘 하에 성공적이었습니다. 적은 병력을 멀리 물리고 휴전과 같은 대치상태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지휘관은 왕국이 많이 황폐해진 상황이기에 적을 쫒아 성을 나서기보다는 2차 수성전을 대비해서 성벽 주변에 해자를 더 파고 접근을 막는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잠잠하듯 보었던 적군은 생각지 않은 경로로 땅굴을 파고 왕국에 침투한 것이었습니다.
현재 아버지의 상황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암이라는 적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원통하지만 후회나 원망으로 인한 울분과 절망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돌이킬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담당 주치의에 대한 원망도 이해됩니다. 하지만 유명한 사령관이더라도 열세인 전력으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전략을 세운 것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지, 사령관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속상한 마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시겠지만 의료진에 대한 원망과 치료 선택지에 대한 후회를 가슴에 지니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시지 않도록 걱정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이제 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어떤 내용으로 마무리할지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절망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세요.
아버지가 이루었던 왕국의 유산은 풍요롭고 든든하게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아버지의 자손들이요
두번째는 아버지께서 이루어오신 인생의 여정과 업적에 대한 저희들의 기억들입니다.
살아있지 않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아버지는 저희 자손들의 기억과 마음에서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그거 아시나요?
아버지께서 다 큰 동생과 언쟁을 한 후 흥분하며 연락하실 때 아버지와 동생의 그 '꽂히는 바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이 겹쳐지며 정말 비슷한 성격이고 집안 내력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도 꽤 그렇구요. 그 고집스럽고 집요한 경향을 저희 애들 삼남매 중 한 아이도 그대로 빼 닮았습니다.
그런 고집과 집요함의 내력도 끈기와 인내 그리고 개성으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기억하며 그 아이의 완고함도 잘 품어서 행복하고 멋진 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남은 시간도 소중히 잘 보내기로 해요. 아버지의 유산들.. 사진 앨범으로 만들어서 곧 가져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