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삶의 이유

by PlanetWalker

아버지가 떠난 뒤, 나는 한동안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시계 바늘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으나, 내 삶의 시간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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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자, 아침이 와도 세상은 밤처럼 어두웠고, 밤이 깊어도 정신은 명료하게 깨어 잠들 수 없었다. 일상의 모든 소음이 갑자기 낯설게 들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의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 카페의 소란스러운 음악, 동료들의 가벼운 웃음소리…

그 모든 소리가 먼 행성에서 울려오는 잡음처럼 이질적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시작했다. 책상 앞에 앉아 눈을 감고, 단 1분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숨만을 느껴보자는 작은 시도였다.

처음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려왔다. 냉장고의 웅웅거림, 새벽의 찬바람 소리, 그리고 내 가슴 속 심장의 박동. 그것들이 비로소 ‘살아 있음’의 증거로 내 몸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명상을 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에너지로 내 안에 머무르고 계신다고. 그분이 사랑하던 방식, 특유의 말투와 웃음소리, 그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나의 몸과 마음 어딘가에 유전자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다시 만나게 하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경이로운 시작이었다.


이제 나는 매일 퇴근길에도 명상을 한다. 번잡한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던 이어폰을 빼고,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기둥을 붙잡은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쉰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 단순한 리듬 속에 세상의 소음도, 내 안의 혼란도 조금씩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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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묻는다.

“명상을 하면 도대체 뭐가 달라지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는 고요 속에서, 모든 게 새로워집니다.”


아버지가 떠난 뒤, 나는 매일 작게 죽고 매일 작게 태어난다. 명상은 그 죽음과 탄생의 리듬을 배우는 일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듯, 삶 또한 그렇게 우리를 통과해 흘러간다. 그 단순한 진리를 몸소 체험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눈을 감으면 후회의 파도가 숨을 막히게 했다.


“왜 그때 더 따뜻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시간을 미뤘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들을 억누르지 않기로 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바라보았다.


‘아, 지금 후회가 밀려오는구나’, ‘이것은 슬픔이구나’, ‘이것은 두려움이구나.’

그렇게 제삼자의 눈으로 감정을 바라보자, 날뛰던 마음의 파도가 서서히 잔잔해졌다.


매일 새벽, 나는 1시간의 명상으로 하루를 연다. 어둠 속에서 새벽의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그 시간은 나에게 ‘작은 장례식’과 같다. 어제의 나를 조용히 보내주고, 오늘의 나를 온전히 맞이하는 의식이다. 예전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겼지만, 이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의 힘을 믿는다. 멈춤 속에서 비로소 삶의 진실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잔해 속에서 꽃을 심던 노인을 본 이후, 내 마음은 한결 더 차분해졌다.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도 기적 아닐까요”

그의 말은 내 안의 호흡을 더 깊게 만들었다.


며칠 후, 서점의 한구석에서 낡은 갈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만났다.

붓다의 말, 숫타니파타(Sutta Nipāta)》였다. 책을 펼치자마자 운명처럼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이는, 세상을 다스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그 한 문장이 내 존재를 관통했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서 책을 덮지 못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혹은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달려왔지만, 정작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괴로워했던 나였다. 그 문장은 마치 나를 향해 직접 건네는 말 같았다.


‘세상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먼저 네 안의 마음을 바라보라’는 준엄한 가르침 같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다시 그 구절을 펼쳐 읽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답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밖’을 바꾸려는 대신, ‘안’을 들여다보겠다고. 그게 내가 그 노인을 보고 느꼈던 평정의 근원이자, 이것이이 깨달음의 방향임을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느껴보았다. 숨이 들어올 때, ‘살아 있다’는 감각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숨을 내쉴 때, 하루의 피로가 조금 흘러내렸다. 그 단순한 행위가 내 안의 파도를 잠재 웠다. 사람들의 말소리, 전철의 덜컹거림, 차창 밖의 불빛이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들 사이에서 ‘고요’를 들었다.

명상은 나에게 도피가 아니라 귀환이었다. 삶의 바다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이제 나는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파도를 바라보는 시선, 그 위에서 중심을 잡는 감각이 생겼다.

처음엔 단 10분이었지만, 그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하철 안의 짧은 명상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은밀한 의식이 되었다. 이전에는 피로와 불안이 나를 휘감았지만, 이제는 그 감정들이 지나가는 파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위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날, 텔레비전 속 노인이 심던 꽃은 지금 내 마음속에서도 피어 있다. 그건 화려하지 않지만,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 꽃은 외부의 성공이 아닌, 내 마음속 평정에서 자라났다.


“행복은 세상을 통제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순간에 찾아온다.”


나는 이제 그 문장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머리가 아니라, 호흡과 함께,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화가 나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미워하려는 순간에도,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 짧은 멈춤 하나가, 나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명상은 내게 ‘영원한 평화’를 준 건 아니다. 다만 순간순간, 삶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으로써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순간순간에 닿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안다. 숨을 들이쉴 때, 바로 그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명상은 나에게 영원한 평화를 약속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순간순간, 거친 삶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게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깨달음은 특별한 성인만이 얻는 신비로운 체험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숨을 들이마시는 그 찰나의 순간에 닿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였다.

나는 이제 안다. 숨을 들이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그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을. 삶의 목적은 돈과 명예, 혹은 거창한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하며, 미래가 아닌 ‘현재의 깊이’ 속에 머무는 데 있다.

아버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슬픔이 아니라, 나를 멈추게 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 이 고요한 시간들이다. 나는 오늘도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쉰다. 내 안의 조용한 멈춤 속에서, 삶은 다시 찬란하게 피어난다.


“잘 놀다 갑니다!”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나는 오늘 하루라는 기적을 정성껏 살아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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