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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움 즐거움 Jul 13. 2023

경계선 세우기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거리

인생의 교훈을 알만한 나이인데 또 다시 나의 아킬레스건에 문제가 생겼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내 모습을 본다. 이것은 직업병인가, 어쩔 수 없는 본래의  성격인가, 고칠 수는 있는 건가?

길가에서 장소를 몰라 헤매고 있는 이름 모를 외국인에게도, 갓난 아이를 안고 버스에 탄 아기 엄마에게도, 바닥에 카드를 흘린 지하철 옆자리 사람게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반응이 조건 반사로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그 사람이 나와는 하나도 관계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엎으러진다. 너무 과할 정도로 도움을 주고 또 그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 사랑을 허용한 내 스스로를 탓한다.


나와 너의 경계가 있을지언데 찹쌀떡처럼 나의 경계를 넘어가 상대에게 도움을 준다. 어느새 상대는 나의 호의를 권리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럼 난 또 속상하다. 삶의 패턴처럼 익숙한 모양새다. 또 한 번 실수를 범했다.


조직 생활에서도 나는 스스로 '도움이 되고자'하는 사람 쪽이었다. '돕는 사람'은 나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래서 이윤 하나 남기는 것에 관련이 없는 그런 직업군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 돕는 일이 그저 좋았다.


문제는 내가 남을 챙기느라 내 자신에게는 철저히 소홀하다는 것이다. 내 몸을 잘 챙기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내 마음도 잘 돌보지 않는다.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인간 관계인지, 상처가 되는 것인지 앞 뒤 분간 못 할 때도 많다. 나이가 먹으니 평생 내가 그렇게 산 것도 후회가 되는데, 지금도 그런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고, 미래에도 똑같이 그럴 것 같아서 더 걱정이다.


자세히 돌아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내 마음의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살아왔기보다는 그저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으로 버텨온 세월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주관'이란 게 없다.


그래도 일적인 면에서는 비교적 앞, 뒤가 분명한데, 이게 인간관계와 관련된 일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음이 약해진다. 상대방을 너무 이해하려고 한다.

자각했으니 되었다. 가만히 내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나의 좋은 마음을 이용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내 마음의 주인은 나고, 그러니 화를 내도 된다고.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괴로웠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 역할은 이제 그만 하련다.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임을 안다.


나도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 착하게 말고 나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할 말을 하면서 살고 싶다. 오직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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