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 끝난 자리에 남은 나
“야, 요즘 살아는 있냐?”
제13회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이던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톡이 왔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한 달 넘게 연락을 끊고,
인간관계 대신 문장과 연애 중이었다.
주말마다 사람을 만나던 ENFP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판만 두드리다니...
친구 입장에서는 거의 실종 사건이었다.
퇴근 후엔 어김없이 “자격증 공부 좀 하러 간다”는 말로 집을 나섰다.
도서관 책상 위에는 자격증 교재 대신 노트북이,
노트북 안에는 끝없는 초고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누가 봐도 이중생활자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그렇게 ‘두 개의 나’가 오가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나는,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살아 있었다.
늘 구내염을 달고 살았지만,
누구보다 총명한 눈으로 글을 작성했다.
현실의 나보다, 글 속의 내가 더 진짜 같았다.
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언젠가 써야지’ 하며 몇 년을 미뤄왔는데,
어느 날 브런치북 공모전 공지를 보게 됐다.
‘제13회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
이름만 봐도,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묵혀뒀던 마음이 확 타올랐다.
‘그래, 이번엔 진짜 써보자.’
그때부터였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쓰고,
커피를 리필하면서 단어와 싸웠다.
글이 잘 써지는 날엔 세상을 구한 기분이었고,
안 써지는 날엔 존재 자체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과정이 즐거웠다.
“이 글만 완성하면 세상이 조금 더 이해될 거야.”
그 믿음 하나로 한 달을 달렸다.
ENFP의 뇌가 이렇게 집중된 건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는 거의 열정형 소방차였다.
불붙은 문장을 꺼야 한다는 강박으로,
매일 도서관 불이 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감이 끝났다.
문득 시계가 멈춘 듯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끝났다”라는 말이, 의외로 쓸쓸했다.
공허감이 몰려왔다.
매일 불태우던 에너지가 빠져나가자,
갑자기 몸 안이 텅 빈 듯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써둔 원고가 있었고, 독자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참 고마운 일이 있었다.
댓글 하나, 공감 하나, ‘좋아요’ 한 번이
이상하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오늘도 기다렸어요.”
그 한 문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보다 강력했다.
그래서 다시 썼다.
추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응원과 댓글 덕분에,
무사히 글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
내 감정의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구글을 뒤적였다.
심리학에서는 이 감정을
‘창작 후의 공허(Post-creation emptiness)’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몰입하던 세계가 끝나면, 그 안에 있던 ‘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세계에서 한 달 동안 살았다.
글을 쓰며 생각했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계가 닫히자, 나도 살짝 문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허무는 실패의 징조가 아니라 진짜 몰입의 흔적이라는 걸.
다 쏟아냈다는 건, 그만큼 충만했다는 뜻이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 질문이 바로, 다 살아냈다는 신호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웃기면서도 멋있었다.
친구가 “이번 주말 파티 오냐?” 묻자
“미안, 나 오늘은 글 써야 돼.”
이 말이 그렇게 진지하게 나온 건 내 인생 처음이었다.
ENFP가 파티 대신 문장을 택하다니...
인류 진화사에 남을 일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진심이었다.
타인과의 대화 대신, 나 자신과의 대화를 택한 시간이었다.
늘 사람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믿었지만,
그때 처음 알았다.
진짜 좋은 대화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는 걸.
이제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따뜻하다.
도서관 불빛 아래에서,
글 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리던 나.
그 몰입의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세계를 살아냈으니까.
끝났다는 건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한 세계를 온전히 살아냈다는 뜻이다.
오늘도 나는 그 여운을 품고,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끝났다는 건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한 세계를 살아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