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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심리칼럼

불안과 나르시시즘: 자기애는 어떻게 불안을 낳는가?

나는 왜 나를 사랑하면서도, 늘 불안한가?

by 심리한스푼


1. 거울 속의 소년

물결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그 얼굴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곧 저주가 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 이야기다.


209221_helmut_lang.jpg 호수 속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키소스


그의 비극은 단순한 허영의 교훈으로 읽히곤 하지만,
사실은 인간 심리의 근원적 구조를 은유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
인간은 언제나 이 질문의 거울 앞에서 서성인다.


우리는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불안을 낳는다.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일까?’
‘타인은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질문이 잔잔한 호수를 흔들며,
우리의 내면을 끊임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이 글은 그 흔들림의 심리학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나르시시즘과 불안, 이 두 감정의 얽힘을 통해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너지는지를 들여다본다.



2. 나르시시즘, 인간의 본능인가, 병리적 현상인가?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자기애적, 이기적, 자기중심적 —

그러나 이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절반의 이해일 뿐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스펙트럼이다.
DSM-5에서는 자기애적 성향을 단순히 병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우쳐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나 현실 검증력이 손상될 때만
‘자기애성 성격장애(NPD)’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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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곧, 나르시시즘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뜻이다.
적정한 자기애는 건강한 자아의 기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는 감정,
그것이 바로 자기애다.


문제는 그 균형이 깨질 때다.
불안이 자아를 흔들면,
자기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으로 변한다.
그 갑옷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안쪽에서는 끊임없이 금이 간다.


그래서 불안과 나르시시즘은
결코 분리된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양면이다.



3. 프로이트의 시선: 자기애의 기원과 상처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인간 정신의 필수적인 에너지로 보았다.
그는 ‘리비도(libido, 심리적 에너지)’가

자신에게 향한 상태를 나르시시즘이라 불렀다.


▪ 일차적 나르시시즘

유아는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세상 전체가 배고프고,
울면 세상 전체가 함께 울어야 한다.
이 시기에는 자신이 곧 세계이며,
세상이 곧 자신인 자기중심적 통합 상태다.


▪ 이차적 나르시시즘

하지만 성장하면서 인간은 타인을 알게 된다.
사랑하고, 거절당하고, 상처받는다.
그때 외부로 향했던 에너지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간 —
그것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다.


IogkiCbPrQJ2EdW365L4jTZ1t_HPBXtlu5BZpaiX-470MVgaP90_qBYeeULT0Dc3bP0Q5QxuRLMCuEk4a5Mbng.jpg 프로이트 사진

프로이트에게 이 현상은
‘상처받은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 기제’였다.
사랑이 부서질 때,

자아는 그 조각을 품은 채 다시 자신 속으로 숨어든다.


이때 생기는 것이 바로 자기애적 상처(ego injury)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이상적인 나(ego ideal)’를 품고 산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 내면의 기준 말이다.
그 기준에 닿지 못할 때, 자아는 균열을 경험한다.


그 균열은 불안으로 드러난다.

“나는 부족하다.” → 수치심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 → 분노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인가?” → 불안


결국, 나르시시즘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다시 나르시시즘을 부추긴다.
자아는 이 순환의 고리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게 된다.



4. 불안의 심리학: ‘나’를 지키려는 두려움

불안은 자아가 위협받을 때 울리는 경보음이다.
그 위협은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내면의 이상적 자아로부터 올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자아가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신호”로 보았다.
즉, 완벽해야 한다는 이상자기의 압박감은
스스로를 향한 불안의 불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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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때로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이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내면의 명령이다.
그 명령에 시달릴수록 우리는 더 완벽하려 애쓰고,
그 완벽함이 무너지면 더 불안해진다.


결국, 불안은 자기애적 구조의 심장부에 있다.
우리는 불안을 피하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자아의 균형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이다.



5. 자기애는 어떻게 불안을 낳는가

나르시시즘은 처음엔 자아의 보호막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보호막은 너무 단단해지면
외부의 따뜻함까지 차단해버린다.


“나는 괜찮다”는 확신이 아닌,
“나는 괜찮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는 순간,
자기애는 불안을 품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확인하고,
그 시선이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을 느낀다.


즉, 자기애의 결핍이 불안을 만들고,
그 불안이 다시 자기애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생긴다.


결국, 불안은 “자신을 잃을까 두려운 마음”이며,
나르시시즘은 “그 마음을 가리고 싶은 욕망”이다.
두 감정은 서로를 비추며,
우리를 그 거울 속에 가둔다.



6. 나아가며: 거울 속 나를 직면하는 용기

본인은 나르키소스 신화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자 한다.

나르키소스의 죽음은 단순한 교만의 비극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바라보고자한다.


나르키소스의 비극은,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물결 위의 ‘이상적 자아’였고,
그 아래 흔들리는 진짜 자신은 끝내 외면당했다.


우리의 불안과 자기애 또한 그와 닮아 있다.
불안은 자아의 결핍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내면의 신호다.
이 감정을 탐색하는 일은 단순한 자기분석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다.


우리는 흔히 ‘나르시시즘’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만,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심리적 스펙트럼의 일부다.


자기애가 지나치면 고립을 낳지만,
적절한 자기애는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힘이 된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삶을 능동적으로 가꿀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애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불균형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조율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불안이 있다.


자신의 불안을 인식하고,
그 불안이 말하는 언어를 귀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거울 속의 나를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거울 속의 나를 외면하지 않고,

그 흔들림마저 바라보는 용기.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불안의 근원에서

진짜 자기애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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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줄 요약

“불안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다른 이름이며,
나르시시즘은 그 마음을 지키려는 갑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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