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심리칼럼

사랑에 빠지는 건 쉽고, 사랑을 하는 건 어렵다.

알랭 드 보통을 읽다가 연애사를 반성하게 된 날

by 심리한스푼

1. 우리는 왜 자꾸 사랑에 “빠지는” 걸까

최근 독서모임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다.

이 책은 겉보기엔 연애 소설인데,

읽다 보면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로맨스를 읽는다기 보다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냉철한 사유를 읽어내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 많지도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공감이 된다.
아마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다 한 번쯤은 겪어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못 겪었다면.. 죄송합니다 ㅠ)


읽고나서 내 머리속에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다”고 말할까?


빠진다는 말에는 책임이 없다.
미끄러진 거고,

사고였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강력한 이상화 단계다.
상대는 실제 인간이 아니라,
내가 투사한 ‘최적화된 환상 패키지’에 가깝다.


쉽게 말하면,
상대는 그냥 존재하고
나 혼자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는 상태다.

(과거의 흑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2. 콩깍지가 벗겨지는 과학적인 이유

문제는 이 영화가 영구 상영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졌다”는 순간이다.


이때 많은 커플이 충격을 받는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아니, 원래 그 사람이 맞다.
그동안 우리가 못 본 거다.


이와 같은 이상화의 붕괴가 일어나면,
도파민과 환상이 만든 필터가 걷히면서
현실 해상도가 갑자기 올라간다.


그 결과,
웃는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코도 골고, 말도 끊고,
내 메시지를 읽씹하는 현실 인간이 된다.


이 단계에서 많은 관계가 흔들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순간이야말로 관계가 처음으로 현실에 착지하는 지점이다.



3. 사랑에 빠지다 vs 사랑을 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개념을 하나 나눠보고 싶어졌다.


'사랑에 빠지다'는 감정의 사건이고,
사랑을 하다는 의지의 선택이다.


빠지는 건 자동이고, 하는 건 수동이다.
무엇보다 하는 건 노력이 들어간다.


상대가 이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이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때부터가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닿는다.
프롬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능력으로 본다.


사랑은 설렘 유지 프로젝트가 아니라
이해, 책임, 헌신, 그리고 반복적인 조정 작업이다.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
장기 유지형 협업에 가깝다.



4. 열정이 끝난 뒤에 남는 것

많은 사람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관계의 사망선고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예전 같지 않은 게 정상이다.


초기 연애의 폭발적인 흥분 상태는
생물학적으로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약 유지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신경계 과부하다.


열정이 잦아든 자리에 남는 건
두 명의 평범한 인간이다.
그때부터 필요한 건 감정보다 기술이다.


차이를 조율하는 능력,
실망을 관리하는 능력,
그리고 다시 말 걸 수 있는 용기.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사랑을 환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얼마나 자주 오해와 실망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관계를 선택하는 이유를 묻는다.



5. 진짜 사랑은 조용히 시작된다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은 단순했다.
사랑에 빠지는 건 운에 가깝지만,
사랑을 하는 건 태도에 가깝다는 것.


설렘은 자동으로 오지만,
관계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환상이 걷힌 뒤에도
“그래도 함께 해보자”고 말하는 순간,
그때 사랑은 감정에서 행위로 바뀐다.


어쩌면 진짜 사랑은,

불꽃놀이가 끝난 뒤,
조용히 불을 다시 켜는 일에 더 가깝다.


한 줄 정리

"사랑에 빠지는 건 사고처럼 오지만,
사랑을 하는 건 환상이 끝난 뒤에도 다시 선택하는 작은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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