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들이 사람의 1평방미터 안에 과거와 현재의 조각으로 부유하고 있다.
깔깔대는 웃음에 흩어지기도 하고, 깊은 한숨에는 코밑에 찰싹 붙어 있기도 하다.
나는 그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나일까? 그것은 내 곳곳에 새겨져 있으니 아무리 부정하여도 생산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색깔만큼이나 무수한 세계가 저마다의 경험에 생성되고 이미 부산물로 자리 잡은
것들과 적당한 거리에 공존하게 된다. 부산물은 그렇게 사람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할 때부터 부산물과의 동거는 시작된다.
다른 세계를 품은 사람들이 만나 상호작용을 한다.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한다. 각자의 1평방미터 안에서는 셀 수 없는 부산물이 생성되고 의미가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상념 된다. 얼추 짐작건대, 만들어진 부산물의 밀도는 색을 얇게 겹쳐 재봉한 듯 촘촘히 생긴 것도 있고, 바람에 날아갈 한 올의 실처럼 생긴 것도 있다. 그렇게 세상에 튀어나와 버린 예사로운 것들은 생산자의 자각과 허락 없이도 꾸준히 자생하는 생리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은 오래된 부산물들 중 ‘더는 없어도 되겠구나.’ 싶은 것이 있다. 과거의 시간에 드문드문 붙어있는 메마른 조각은 특정한 때가 되어서야 떨어져 나가려 한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자국만 남을 뿐 그것은 더 이상 부산물로 의식되지 않는다.
타고난 예민한 기질. 그래서 나의 1평방미터에는 슬픔과 불안이 있다. 그것들을 부정하며 발로 힘껏 걷어차 버린다고 한들 그 안에서 끊임없이 가변 하기에 결국 공존하는 관계로 지낼 수밖에 없다. 나의 외로움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희망과 용기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아직 해갈되지 않은 것들을 뜰채로 살살 떠 골라내어 햇볕에 잘 널어 본다. 내가 그 안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좋은 환경이길 바라며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만지고, 볼 수 있는 부산물들의 특징을 인지해 본다.
버리고 싶은 부산물의 존재에는 지루한 무게감이 있다. 부는 바람에 휘휘 날려 버릴 수 없고 내리는 비에 몰래 흘려버릴 수도 없다. 버려지는 것에는 주고받은 사람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냄의 존재로 인식하려 노력한다. 보낸다는 것은 어디로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에 새겨진 촘촘한 의미를 1평방미터로부터 떼어내는 일이다. 스치고 머물다가 변하는 시간 동안 서로가 만든 의미들로부터 말이다. 이런 작용에 따라 그 무게감이 조금씩 덜어지며 비로소 버림이 아닌 보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서로의 향기가 닿는 1평방미터 안에서 살아간다. 가끔 주변의 소리가 고요해질 때에 나의 1평방미터에서 들리는 정성스러운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내게 주어진 넓이에 어떤 씨앗을 심고 가꾸었는지, 씨앗이 우거진 수풀이 되어 청량하고 뜨겁던 날들은 잘 머물다 갔는지, 엉킨 수풀 뒤에 구불구불한 고목
이 부러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는지. 그렇게 오늘도 생각난 김에 양팔을 벌려 휘적거리면서 부산물들이 있는 나의 1평방미터를 어루만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