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그적거림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문 그적 씨(31세, 사원)는 오늘도 뭉그적거리다가 한 소리를 들었다.
“그적 씨. 오늘까지 주기로 했던 신사업 관련 발표 자료 아직이야?”
“아… 그게 저 대리님. 혹시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아니 2주나 줬는데 아직도 못 했다는 게 말이 돼? 나도 얼른 과장님께 보고 드려야 한단 말이야. 일단 준비된 만큼만 가져와봐요.”
“그게 시작은 했는데 하다 보니 검토할 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해서 드릴게요.”
“이게 도대체 몇 번 째야? 이런 식이면 나 그적 씨한테 일 못 줘. 뭘 제때 해오는 법이 없으니 원.”
실은 검토할 게 많았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다. 하기 싫어서 미루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났고, 그 뒤로도 키워드 몇 개만 적어 두고는 딴청만 피우다가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문 그적 씨가 기한 내로 제출하는 보고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게다가 마감이 임박해서 다급하게 작성한 결과물은 완성도 역시 떨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 그적 씨는 입사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상사들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이 일상이요, 곧 있을 대리 진급 대상에도 오르지 못할 것 같아서 초조하다.
문 그적 씨의 뭉극적거림은 집에서도 계속된다. 자취생인 문 그적 씨의 원룸 오피스텔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설거지통에는 라면 면발이 둥둥 떠다니는 냄비, 밥풀과 잔반이 그대로 눌어붙은 편의점 도시락 그릇이 이틀 째 방치되어 있다. 매번 분리수거 배출일도 지키지 않아 베란다에는 빈 맥주 캔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오늘 퇴근 후에는 기필코 청소를 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겠노라 다짐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문 그적 씨는 어김없이 옷가지들에 점령당한 소파 한편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다. 출근용 슬랙스 바지와 신축성 없는 블라우스가 불편한데도 갈아입는 것이 귀찮아서 양말만 겨우 벗은 상태이다. 티브이를 배경 음악 삼아 틀어두고는 하염없이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내리며 유튜브를 시청한다. “아… 씻어야 하는데… 오늘 분리수거 날인데… 아 귀찮아… 딱 20분만 쉬고 해야지”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강렬한 허기를 느끼자 문 그적 씨는 비로소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어기적대며 부엌으로 걸어가 컵라면 하나를 뜯는다.
문 그적 씨의 일상은 귀차니즘에 잡아 먹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루지 않겠다고 마음은 늘 먹지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없다. 이렇게 맨날 마음만 먹어서 배가 부를 지경이다. 게으른 것이 아니라 피곤한 것이라고, 나태한 것이 아니라 느린 것이라고 변명해보지만 이제는 그적 씨 자신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어서 나태 지옥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 고과 평가 때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생업마저 잃을 것 같다. 과연 문 그적 씨는 미루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미루는 사람이라고 모든 일을 미루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부지런할 때가 있으니 바로 재미있는 일을 할 때이다. 30분이면 끝낼 수학 숙제는 며칠씩 미루면서 몇 시간씩 걸리는 컴퓨터 게임이나 온라인 쇼핑에는 세상 제일 빠른 사람이 되어 본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주로 하기 싫은 일을 미룬다.
우리는 어려운 일도 미룬다. 과제가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설사 그것이 흥미롭다 해도 쉬이 시작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한 자릿수 덧셈 문제 5개를 푸는 숙제와, 서술형 이차방정식 문제 20개를 푸는 숙제 중 어떤 것이 더 만만해 보이는가? 전자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짬 내어 할 수 있지만, 후자는 따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서 제대로 각을 잡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만만찮다.
이때 하기 싫음과 어려움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 온라인 쇼핑을 하는 것보다 흥미진진하고 기대되는 일일 수 있다. 또 평소 집안 정리를 깨끗이 하던 사람이라도 며칠 동안 야근을 지속한 후에는 그릇 몇 개 씻는 일이 버거울 수 있다.
그 일이 하기 싫든 어렵든, 심리적으로는 모두 “힘들다”라고 간주되어 난이도가 껑충 뛰어오른다. 과제의 장벽이 높다고 느끼면 마음 자세부터 달라진다. 슬리퍼 신고 집 앞 마트에 가는 게 아니라, 장대를 들고 본격 높이뛰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당연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고 부담감은 이내 미루기로 이어진다. 조금만 이따가, 물만 좀 마시고, 나중에 “시작”해야지 하며 기약 없이 시작을 미룬다.
미루기에는 손해가 따른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크고 작은 성취를 하고, 이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다. “나는 성취욕 따위 없는 사람인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자기가 수천 번의 도전을 통해 걸음마라는 과업을 이뤄낸 장본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속하게도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취를 하려면 십중팔구 하기 싫고 어려운 일들을 해야만 한다.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성인으로서 최소한의 몫을 하는 데에도 재미만 추구할 수는 없다. 누군가 미루고 미루다 저버린 책임은 결국 다른 사람, 혹은 사회가 대신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루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단번에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라도 해보려고 보류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나중이라는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 본 사람은 안다. 미루기의 늪은 어마어마해서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러셀 램지(J. Russell Ramsay)와 안소니 로스테인(Anthony L. Rostain)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미루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여기에 필자의 임상 경험을 살짝 보태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전략 1. 과제를 쪼개자.
첫 번째 전략은 뛰어넘기 어려운 높은 장벽을 잘게 쪼개서 쉽게 오를 수 있는 얕은 계단으로 바꾸는 일이다. 어려운 일을 미루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라면, 반대로 과제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서 미루기의 유혹을 없애자. 문 그적 씨에게 발표 자료 만들기란 넘기 힘든 태산과 같다. 그런데 이 거대한 목표를 뜯어보면 더 작은 단위의 행동들이 벽돌처럼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료에 들어갈 키워드 선별하기, 자료 조사하기, 내용 작성하기, 퇴고하기, 양식에 맞게 수정하기 등으로 말이다. 각 단계는 더 작은 단위의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료 조사하기는 다시 “첫 번째 키워드에 대해 검색하기 - 검색한 내용 복사해서 빈 문서에 붙여 넣기 - 출처 기록하기 - 두 번째 키워드 검색하기(반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무턱대고 문 그적 씨에게 자료를 조사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한동안은 문서 창에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볼 것이고, 마음을 다잡고 검색 엔진을 연다 한들 그만 배너 광고에 시선을 빼앗겨 쇼핑의 세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해야 할 일이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데다가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제를 잘게 쪼개면 제 아무리 귀차니즘이 심한 사람이라 해도 해볼 만한 일이 된다. 과제의 첫 단계인 “첫 번째 키워드 검색하기”는 손가락 움직일 힘만 있으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고, 내친김에 검색한 내용 중 하나를 복사해서 자료 조사용 문서에 붙여 넣는 것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미루지 않은 제 자신이 대견하고 신이 나서 나머지 단계들도 단숨에 해낼지 모른다.
과제를 작게 나누기 위해서는 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과제를 떠올렸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도록 분명하고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가령 “집 깨끗하게 하기”라는 말은 머릿속을 안개처럼 뿌옇게 만든다. 깨끗함의 기준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뭘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막막하다. 막막하고 부담스러우면 미루고 싶은 마음이 끼어들기 딱 좋다. 그런데 “소파에 널브러진 옷들을 빨래통에 넣고 청소기로 거실 먼지 빨아들이기”로 목표를 정하면 어떨까?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더 작은 단위로 나누기도 수월하다. 이처럼 과제는 구체적인 행동을 담고 있는 것이 좋다.
과제를 작게 나누는 건 알겠는데, 그럼 대체 얼마큼 작게 나누라는 건가요?
본인이 느끼기에 너무 쉽고 만만해서 언제든 부담 없이 시도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누면 된다. 과제의 첫 단계는 아침잠이 덜 깼을 때에도, 퇴근 후라 몸이 천근만근일 때에도, 심지어 기분이 아주 나빠서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떠올리는 것조차 싫을 때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변 시선이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하시기를 바란다. 10분 운동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과감히 3분으로 줄이자. 그야말로 내 기준에서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하겠다 싶은 일들을 첫 단계로 만들어야 한다.
전략 2. 시작하자.
미루기란 결국 “시작”을 미루는 것이다. 시작을 하고 안 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아예 해본 적도 없는 행동 없음의 상태이지만, 일단 작게라도 시작하면 무로부터 벗어나 유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러니 쉽고 만만한 첫 계단을 만들었다면 지체 없이 발을 내디뎌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얻은 작은 성취감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연료가 된다.
만약 문 그적 씨처럼 일단 시작은 했는데(키워드 적기) 그다음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면? 시작 후에도 뭉그적거림이 계속된다는 것은 2단계의 장벽이 너무 높아서이다. 새로운 미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는 전략 1로 돌아가 다시금 과제를 쪼개서 만만한 첫 단계를 새로이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문 그적 씨가 전략 1을 사용해서 자료 조사까지는 훌륭히 마쳤지만 내용 작성하기를 미루고 있다 치자. 이는 내용 작성하기라는 목표가 문 그적 씨에게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는 신호이다. 그럼 내용 작성하기를 “조사한 자료의 첫 문단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기 - 두 번째 문단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기 (반복) - 요약한 문장들 PPT에 옮기기 - 보기 좋게 배치하고 폰트 키우기” 등으로 세분화하고, 새로운 첫 단계를 시작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두 전략을 반복하며 조금씩 오르막을 걷다 보면 어느덧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정상에 올라 있을 것이다.
미루기란 결국 시작의 실패이다. 실패가 반복되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신감을 잃는다.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수록 도전할 용기와 시작할 힘도 점차 사라진다. 미루기의 늪이 무서운 이유이다. 늪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작고 쉬운 일부터 당장 시작하라.
* 참고 문헌
J. Russell Ramsay & Anthony L. Rostain (2015), The adult ADHD took kit: using CBT to facilitate coping inside and out.
* 표지 사진 출처: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