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 공격적 행동에 감춰진 속마음
은 미리 씨(29세, 회사원)는 요즘 상사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올해부터 김 과장과 함께 상품 하나를 기획하기 시작했는데, 은 미리 씨가 상의도 없이 내용을 변경해서 부서 회의 때 보고한 일이 발단이었다. 김 과장은 회의 내내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니 끝나자마자 미리 씨를 따로 불러냈다.
“미리 씨. 나한테 말도 없이 내용을 변경하면 어떡해? 이런 기본적인 애티튜드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해? 앞으로 변경 사항 있을 때마다 보고해주면 고맙겠어.”
아무리 실수를 했다 해도 기본적인 애티튜드까지 운운해 가며 지적을 당하니 은 미리 씨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평소 윗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한 미리 씨는 변명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가슴팍부터 귀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은 한 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은 미리 씨는 김 과장의 분부를 받들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메신저로 보내기 시작했다.
“과장님, 오늘은 점심 식사 후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00 대리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PPT 13쪽에 나온 사업 성과 내용에 작년 통계자료를 하나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글자 수가 늘어나서 폰트 크기를 한 단계 줄였습니다. 변경 사항 생기면 또 보고 드리겠습니다.”
김 과장은 하루에도 십 여 차례 은 미리 씨의 자질구레한 일상이 담긴 메신저 폭탄을 받아야 했다. 며칠 뒤, 참다못한 김 과장이 은 미리 씨를 다시 불러냈다.
“미리 씨. 자세히 보고하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때마다 메신저를 보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업무에 방해가 되잖아.”
“아… 저는 그저 과장님께서 변경 사항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하셔서…”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중요한 내용을 혼자서 바꾸지 말고 상의하라는 뜻이지, 이렇게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알려 달란 말은 아니었어. 융통성 있게. 응?”
“제가 또 큰 잘못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미리 씨. 큰 잘못을 했다는 게 아니잖아. 기분 상한 게 있으면 차라리 터놓고 말을 해봐.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지 말고.”
“... (침묵) …”
“은 미리 씨.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야?”
“... (침묵) …”
그래서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상대방을 골리는 듯한 느낌이다. 김 과장 입장에서는 그냥 넘기자니 부아가 치밀고, 대놓고 말하자니 치사스럽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꾸중을 듣는 은 미리 씨에게 한 마디라도 더했다가는 오히려 김 과장만 후배 잡는 상사가 될 판이다. 주변 사람들은 은 미리 씨를 아리송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듯 착하지 않은, 순둥순둥 하다가도 가끔씩 골 때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이처럼 외견상으로는 악의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무의식적인 공격성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행동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수동 공격적 행동(passive-aggressive behavior)”이라고 한다. 수동 공격적 행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방을 치우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알겠다고 대답해놓고 마냥 늦장을 부리는 행동부터, 상사의 지시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잠수를 타버리는 행동까지, 가지각색이다. 때로는 빈정거림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물으면 핑계는 많으나 절대 하기 싫어 그랬다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뿌루퉁한 표정으로 언짢은 기분을 마구 내뿜으면서도 정작 화가 났냐는 물음에는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이들은 왜 자신의 분노, 반항심, 적대감 등을 이토록 은밀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솔직한 감정 표현과 자기주장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부모님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권위적인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반기를 들기가 어렵다. 자식 입장에서는 순종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게 따르지만 그렇다고 마음 저변에서 일어나는 반항심까지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그럼 자녀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를 드러낸다. 또 어떤 집에서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해서 기분이 나쁠 때에도 늘 웃으며 상냥하기를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 역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데에 서투르다.
감정 표현을 과하게 억압당한 결과, 은 미리 씨들은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내비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안타깝게도 포장된 감정은 남들이 볼 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도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수동 공격적인 사람들 중에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반대되는 두 감정이 공존하는 것을 “양가감정”이라고 하는데, 양가감정은 심리적으로 인정하기가 어렵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나도 내 마음을 모르니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몰라요”라고 얼버무리기 십상이고, 남들도 도통 그 속을 알 길이 없다.
만약 주변에 수동 공격적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말 너머에 있는 행동에 주목하시기를 바란다. 변명과 부인으로 무장된 언어적 표현보다는 행동이 그들의 마음을 더 잘 대변한다. 만약 본인이 수동 공격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라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능하면 전문가가 함께 하는 안전한 환경에서 수동 공격적 행동의 원인을 찾고 감정 표현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감정이란 재채기처럼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다. 어설프게 포장해봤자 오해만 낳을 뿐이다. 나조차도 헷갈리는 포장지는 이만 걷어내고, 진심에 다가가자. 감정은 비밀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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