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조차 차리지 않는 삶에 대하여
한 뻔뻔 씨(55세, 주부)는 결코 손해를 보는 법이 없다. 부당하게 손해를 봤다고 느끼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준비물은 세 가지이다. 큰 목소리, 두꺼운 얼굴, 그리고 우겨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당당한 기백. 오늘은 대형 마트 과일 코너에서 뻔뻔 씨의 권리 주장이 한창이다.
“(한껏 데시벨을 높여) 내가 저번에 여기서 과일을 사 갔는데 두 개가 곯았더라고. 아니 장사를 그렇게 속여서 하면 안 되지~ 나는 이거 보상받아야겠어. 새로운 걸로 한 상자 다시 줘요.”
“손님 죄송합니다. 혹시 저번에 구입하셨던 영수증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 누가 지난 영수증을 갖고 다녀! 내가 여기 얼마나 자주 오는데 서운하게 왜 이래?”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회사 지침상…”
“어디서 지침을 들먹여. 이게 다 보상 안 해주려는 개수작 아냐?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사장!”
사람들은 쩔쩔매는 판매원과 무섭게 기세를 떨치는 뻔뻔 씨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함께 온 뻔뻔 씨의 딸은 엄마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딸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쯤 되면 엄마를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판매원 선에서 일이 해결되지 않자 결국 매니저가 나서서 직접 사과를 하고 상품권 몇 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권리 주장의 현장을 정리하였다. 뻔뻔 씨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선 코너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다고 뻔뻔 씨가 아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민첩하게 행동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뻔뻔 씨를 대신하여 주변에 사과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뻔뻔 씨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일을 위해서라면 체면쯤은 조금 구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 화장실에서 “아이고 제가 급해요. 미안합니다~”하며 살짝 새치기를 한다거나, 음식점에서 메인 요리가 맛있으니 서비스로 조금만 더 달라고 부탁하는 일 정도는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지혜라고 여긴다. 뻔뻔 씨는 한 번 사는 인생, 남의 시선 의식하며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함께 있으면 내가 다 민망해지는 사람, 남들 보기에는 민폐인데 정작 본인은 떳떳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 곁에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며 사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함부로 그들을 흉내 낼 수는 없다. 너무나 창피하기 때문이다. 한 뻔뻔 씨는 어떤 사람일까?
한 뻔뻔 씨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기분은 개의치 않고 목표를 향해 밀어붙인다. 마트의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 판매원의 난처한 입장과 난리법석으로 인해 불쾌해야 했던 주변 사람들의 기분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 보상을 받고야 말겠다는 뻔뻔 씨의 욕구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자기 욕구를 앞세우는 모습은 상당히 자기중심적이다.
개인주의 풍조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 남이 끼어들면 곧 자아가 붕괴될 듯이 말이다. 여기서 약간의 오해를 풀었으면 한다. 남을 의식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않다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개인이 성장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아기는 끊임없이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의 피드백을 받으며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일을 반복하며 자란다. 심리적인 성장뿐 아니라 신체 발육을 위해서도 부모라는 타인이 매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일을 해주어야 한다. 조금 더 크면 보육 기관과 학교를 다니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그 안에서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며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뻔뻔 씨처럼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기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 부모로부터 행동의 한계를 배운다. 그 행동의 한계는 보통 사회 구성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윤리적인 규범을 따른다. 우리는 이것을 “상식”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벗어난 행동은 왠지 모르게 거슬리고 멋쩍어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만약 뻔뻔 씨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상식을 따랐더라면, 판매원에게 좀 더 예의를 갖춰서 작은 목소리로 보상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뻔뻔 씨는 상대의 입장은 물론이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미묘한 주변 분위기와 사람들의 언짢은 시선까지도 모두 무시했다.
때로는 우리가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를 받기도 한다. 평소에 점잖던 사람도 가끔은 일진이 좋지 않아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어 진다. 이때 너무 곁길로 새지 않게끔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타인이라는 울타리이다. 그런데 울타리를 모두 부수고 막 나가면 반드시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대개는 울타리를 부순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 불편을 떠안는다.
뻔뻔 씨와 같은 사람을 두고는 염치가 없다고 말한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사람은 부끄러움을 느끼면 머뭇거리거나 숨는다. 한 마디로 선뜻 행동하지 못하도록 제동이 걸린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너무 많으면 낯선 사람과 대화하거나 발표하는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하다.
반대로 최소한의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머뭇거리고 숨어야 할 때를 알지 못하고 직진만 해서 문제가 생긴다. 남들은 자다가 이불 킥을 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며 반성을 하거나 행동을 교정할 기회가 없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도 정작 본인은 “어쩔 수 없었다”며 너무 쿨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이렇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늘 남의 몫이 된다. 정작 울타리를 부수고 막 나간 당사자는 불편하지 않은 이유이다.
어느 때보다 더 “자기”가 중요한 세상이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다운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체면치레는 그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산물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모여 사는 인간은 그 누구도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체면만 차리면 안 되지만, 체면조차 차리지 않으면 더 곤란하다. 어쩌면 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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