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을 세우지 않고도 나를 세우는 법

나와 남을 피곤하게 하는 의심병에서 벗어나기

by 누스
음식점을 운영하는 조 의심 씨(51세, 자영업)는 사는 게 참 피곤하다. 20대 중반에 처자식을 데리고 상경해서 이만큼 자리를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물주가 사기를 쳐서 가게 보증금을 홀랑 먹으려 하질 않나, 장사가 잘 되니까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고 온 인간들이 동업을 들먹이며 빌붙으려 하질 않나. 어디 이뿐이랴? 희한하게 손님들 중에는 악플을 달고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진상들이 득실 거린다. 호시탐탐 남을 등쳐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역시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말은 진리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과 가게를 지키기 위해 의심 씨는 오늘도 쉼 없이 보초를 선다.

의심 씨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믿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낌새가 있으면 절대 넘어가지 않고 본때를 보여준다. 으르렁 거리며 겁을 줘야 상대도 일찌감치 꼬리를 내리고 공격할 생각을 접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이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정의가 바로 서는 법이다. 물론 의심 씨가 헛다리를 짚어 애먼 사람을 잡을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미안해도 어쩔 수 없다. 당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선제공격이 나으니 말이다.

하루는 타지에 사는 아들에게 줄 음식과 짐을 용달차에 싣고 아내와 먼 길을 나섰다. 웬만해서는 가게 문을 닫지 않는 의심 씨이지만 오늘은 큰맘 먹고 저녁 장사도 접었다. 그런데 들뜬 마음도 잠시,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의심 씨의 기분을 잡치는 녀석이 등장했다. 때깔 고운 외제차 한 대가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의심 씨 앞으로 끼어들더니 미안하다는 인사도 없이 더 속력을 낸다. 원색으로 경망스럽게 개조한 외제차의 뒷모습을 보아하니,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놈이 자신의 낡은 차를 우습게 봤다는 확신이 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의심 씨는 덩달아 속도를 높인다.

“아휴, 이 양반 참 성질 하고는. 속도 좀 줄여요.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조수석에 탄 아내가 손잡이를 꼭 붙들고 남편을 말렸지만, 약이 바짝 오른 의심 씨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저 자식 일부러 위험하게 운전하는 꼬락서니 좀 봐. 저런 것들은 똑같이 당해봐야 해.”
의심 씨는 요란스럽게 클랙슨을 울리고 상향 등을 비추며 외제차의 뒤를 맹렬히 추격한다.


나쁜 놈들만 꼬이는 의심 씨의 인생사를 들으면, 그가 그토록 날을 세우는 이유가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몇 가지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과연 외제차의 운전수는 고의로 위험하게 차를 몰았을까? 왜 의심 씨 주변에는 죄다 등쳐먹고, 사기를 치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인간들 뿐일까? 의심 씨의 팔자가 사납고 인복이 없어서일까?


의심 씨의 팔자가 정말로 사나운지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탐정을 고용했다고 치자. 다음은 탐정이 작성한 가상의 보고서이다.


건물주가 보증금을 올려 받으려는 시도를 한 적은 있지만, 사기를 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사업상 잠깐 급전이 필요했는데, 세입자가 곤란해하던 차에 다른 데서 목돈을 구해서 밀어붙일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제가 바봅니까? 푼 돈 벌자고 법까지 어겨 가며 전 재산 잃을 짓은 안 합니다.”

의심 씨의 장사 수완을 눈여겨본 한 투자자의 증언이다. “장사가 잘 되길래 지점을 내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었어요. 제가 그렇게 키운 가게들이 꽤 되거든요. 근데 말 꺼내기가 무섭게 그 아저씨가 도끼눈을 치켜뜨길래 바로 마음 접었어요.”

소수의 소비자들이 의심 씨 가게에 대한 평점을 최저점으로 준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은 여러 가게에 악평을 남기기로 유명한 블랙 컨슈머들이었고, 그밖에 의심 씨의 음식점을 다녀간 다수의 고객들은 평균 이상의 평점을 부여했다.


사람의 마음이 투명해서 탐정을 고용하지 않고도 단숨에 속내를 간파할 수만 있다면 의심 씨도 경계를 늦출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개 추론을 통해 타인의 의도를 짐작해야만 한다. 이때 의심 씨처럼 상대가 악의를 갖고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타인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도 겉으로만 착한 척을 할 뿐 속엔 다른 꿍꿍이를 숨겼을 거라고 여긴다. 막상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지 물어보면 “딱 보면 알지”, “느낌이 그랬다니까”, “안 봐도 뻔하지”, “눈빛이 이상했어”라는 식의 강한 심증만 있다. 그러다 진짜로 해코지하는 사람을 만나면 타인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화하는 증거로 삼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민감한 위험 탐지기를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다. 그러나 그 탐지기는 별 거 아닌 일도 위험으로 감지하고 요란스럽게 울리기 때문에, 사실상 늘 경계 태세를 취하는 셈이다.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알려면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검증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들과 거리를 두다 보니 치우친 생각을 교정할 기회마저 잃는다. 주변에서도 걸핏하면 날을 세우고 남 탓을 하며 오래도록 앙심을 품는 이들이 편할 리가 없다. 그렇게 의심 씨는 스스로 쌓아 올린 높은 성 안에 갇히고 만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가리켜 편집증paranoia이라고 한다. 뇌의 기질적인 문제로 인해 심한 피해망상을 보이는 경우부터 대인관계에서 경험한 외상trauma으로 인해 타인에 대한 불신이 생긴 경우까지, 원인은 다양하다. 질병 수준이 아니라도 흔히 말하는 의심병은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세상이 무조건 선하다고 믿고 모든 경계를 풀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부정적으로 편향된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균형이 맞아야 진정한 자기 보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개된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 보자.


1. 상황

먼저, 남이 내게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노트에 적는다. 시간, 장소,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좋다. 조 의심 씨는 고속도로에서 경험한 불쾌한 상황을 이렇게 적을 것이다.

10월 20일 오후 5시경, 아내와 함께 아들 집에 가던 중 외제차 한 대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차를 추월함.


2. 가설

다음으로는 상대(외제차 운전수)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행동했을지, 자신이 추측한 내용을 적는다. 굳이 용어를 순화하지 않아도 된다. 당시에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던 생각을 그대로 적어보자.

A: 외제차 모는 놈이 싹수가 없어서 내 차를 우습게 보고 추월한 것. 돈만 많지 가정교육은 못 받아서 운전 예절이 없음.


3. 반대 가설

위의 가설을 A라고 하자. 이번에는 A와는 반대되는 가설 B를 찾을 차례이다. 마음속으로는 A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을 테지만, 억지로라도 외제차 주인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상상해보자. 혼자서 생각해내기 어렵다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구해도 좋다.

B: 가족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에 가는 길이어서 깜빡이를 켤 여유가 없었음.


4. 감정 점수

마지막으로 A라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과 B라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을 0~100점까지의 점수로 나타내 보자. 의심 씨의 경우 당시의 감정이 분노였으므로 "0점: 전혀 화나지 않음, 100점: 극도로 분개함"으로 적으면 된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만의 용어로 적어보자. 쪽팔림, 빡침, 좌절감, 수치심 등 여러분의 마음을 생생하게 대변할 수 있는 말이라면 다 괜찮다.


위의 과정을 표로 정리하면 이래와 같다. 이 방법은 인지행동치료에서 사용하는 기법 중 일부를 빌려온 것이다. 어떤 생각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확장시키는 훈련이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을 취함으로써 우리의 감정과 행동도 변할 수 있다. 만약 의심 씨가 B처럼 생각했더라면, 잠시 불쾌하기는 해도 고속도로에서 위험한 추격전을 벌이는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의심 씨의 믿음대로 가설 A가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가 법정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현실에서는 매사에 당사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다. 그리고 잘잘못을 가리더라도 그에 따라 일일이 앙갚음을 하는 것이 반드시 유익하지도 않다. 무례한 운전수의 버릇을 고친답시고 보복운전을 했다가 큰 사고라도 나면, 자기 보호는커녕 도리어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꼴이 아닌가? 반대로 B처럼 생각한다고 갑자기 모든 위험에 노출되거나 더 큰 해를 당할 일도 없다. 오히려 A보다 B에서 분노 점수가 확연히 낮아지는 것을 보면,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 이득이다.


갑자기 모든 갑옷을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상황을 좀 더 정확히 평가하고 그에 맞는 옷을 입자. 그렇게 날을 세우는 대신 나를 세우자. 더 이상은 높고 외로운 성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를 바란다.


* 표지 사진 출처: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