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엄마직에 종사합니다.
놀이터를 갈 만큼 가서 그런가, 아이들도 싫증이 난 모양이다. 처음에는 두 시간씩 놀아도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언제부턴가 한 시간 남짓이면 지겨운 기색이다. 그래서 요즘엔 슬슬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서관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토론토 퍼블릭 라이브러리에 갈 수 있다. 도서관은 규모가 크고 쾌적했으며, 1층에는 커피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책은 다른 건물에 있다고 했다. 홀몸이었다면 책들 속에 한껏 파묻혀 있다가 커피 한 잔 하며 브런치에 글을 쓰는 여유까지 누렸겠지만, 그건 십 년쯤 뒤에나 해보기로 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본관에서 3분 남짓 떨어진 곳에서 별관과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내데스크를 지나 내부로 깊숙이 들어오자 곧 어린이용 공간이 나타났다. 이미 내니로 보이는 사람들과 몇몇 아이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홀에는 장난감이 놓여 있었고, 한쪽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낮은 탁자와 의자도 비치되어 있었다. 둘째는 부리나케 달려가 기찻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첫째는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페파피그 그림을 알록달록 꾸미기 시작했다. 아이들 모두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이는 분위기였는데, 건물 구조가 소리를 흡수하는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소음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과 도서관에 다니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나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그냥 책이 많은 곳, 그리고 책 읽는 사람들이 있는 곳의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자타공인 최고의 독서광이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인지, 독서하는 분위기는 나에게 늘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선사하곤 했다. 내 동생이야 그 피를 그대로 물려 받아서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읽는 행위는 그리 즐기지 못했고, 대신에 아버지가 책꽂이를 겹겹이 쌓아서 미로처럼 만들어주신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첩보 놀이를 하거나 보물찾기를 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제보다 젯밥에 더 초점이 가있긴 했으나 어찌되었건 책은 나에게 좋은 추억이었기에,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나도 책과 관련된 즐거움을 전해주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낳고 보니 우리 애들은 그런 즐거움을 받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책보다는 다른 놀이에 관심이 훨씬 많아 보였고, 책을 읽어줄 때조차 나보다 자기들이 말을 더 많이 해서 그리 아름다운 그림은 연출하지 못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다 같이 도서관에 갔다가 생각보다 큰 우리 애들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 덕에 캐나다에 와서도 도서관에 가는 일은 꿈도 못 꿨었다. 타국의 도서관에서까지 아이들을 단속하느라 마음을 졸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별다른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자유롭게 놀다가 심심해질 즈음에 책을 한 두 권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했다. 물론 죄다 영어책이었고 개중엔 스페인어인지 프랑스어인지 정체 모를 언어도 있었다. 오마이갓. 네이티브 스피커인 내니가 유창하게 동화책을 읽어주자, 아이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몇 초만에 자리를 떴다^^. 그보다는 구린 영어라도 한국어 통역을 곁들이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앞다투어 엄마에게로 책을 가져왔다. 물론 그마저도 3분을 못 넘겼다.
다행히 첫날 치고는 괜찮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도서관과 척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도 독서를 진정으로 즐기기까지는 거의 30년이 걸린 것 같다. 그전까지는 학업이나 생계가 걸린 책들만 꾸역꾸역 읽어댔다. 하지만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책에 대한 호기심, 호감, 익숙함, 동경은 늘 품고 있었다. 그러다 때가 되자 마침내 책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도 이러한 가능성이다. 그저 책이 있는 공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길, 그 호감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살아가길, 그래서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책과 친해질 수 있길.
그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뭐가 가장 재미있었냐고 물었더니, "기차놀이"랑 "페파피그 그리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