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엄마직에 종사합니다.
육아와 살림이 고된 이유는 단순히 그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힘들게 해 봤자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이다. 오죽하면 집안일을 '해도 티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나는 것'으로 표현하겠나? 밑 빠진 독에 죽어라 물을 퍼부을 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지만, 어쩌다 실수로 물이라도 흘리 때면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이처럼 잘해봐야 본전인 일에서 보람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 사회란, 저 먼 쏘싸이어티까지 갈 것 없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매일 곁에 있는 사람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을 신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다. 타인이 나를 썩 괜찮은 존재로 인정해 줄 때, 나의 노고를 인정해 줄 때 우리는 힘이 난다. 반대로 나의 수고가 평가절하 당하면 순식간에 풀이 죽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같은 편이었어야 할 사람이 '남'의 '편'이 되어 팀킬을 할 때는 더 상처가 된다.
이럴 땐 악마의 꼬드김이 시작된다.
'야. 더럽고 치사하다. 관둬 관둬.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일하면 뭘 하냐. 그게 당연한 건 줄 아는데. 집이 돼지우리가 되든 말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자고. 시궁창이 뭔지를 보여주겠어. 하하하하 다 같이 망하자 우하하하'
가끔은 아이들을 향해서도 이런 마음이 든다.
'이 녀석들이 차려준 성의도 모르고 또 반찬 투정이네. 아주 맨밥만 종일 먹어봐야 정신 차리지.'
하지만 상상 속의 시나리오를 펼치기엔 너무 소심한 건지 아니면 성실한 건지, 이내 또 마음을 추스르고는 쓸고 닦고 씻기고 먹이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나의 찌질함이 싫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찌질함이 나 자신을 엇나가지 않도록 단속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속상한 게 비단 엄마들 뿐이랴. 남편들은 아내의 싸늘한 눈빛과 타박에 자주 전의를 상실할 테고, 아이들은 제 마음을 몰라주는 어른들 탓에 수시로 노여울 테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휘둘리며 일상을 망쳐버린다면 결국엔 자기 손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사회가 날 외면할 때도 꿋꿋하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타인이 날 인정해주지 않을 때, 인정은커녕 깎아내리기만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나라도 날 인정해 보면 어떨까? 물론 이 말이 잘하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추켜세우자는 건 아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인정하려면, 먼저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잘 해내야 한다.
한국에서 줄곧 쿠쿠가 해준 밥만 먹다가 밥솥 없는 이국 땅에 왔을 때, 나는 냄비밥을 할 줄 몰라서 애를 먹었다. 첫 번째 밥은 밥이 아니라 죽이었고,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물을 덜어냈던 두 번째 밥은 그냥 따뜻하지만 퍼석한 불린 쌀이 되었다. 그때 냄비와 고전 중인 나를 힐끔 거리며 한 마디씩 훈수를 던지던 남편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냄비밥 그까짓 거 하나로 속상한 건 아니었다. 캐나다에 와서 전업 주부로 살고 있는 요즘, 나에게는 모든 일이 냄비밥과 같았다. 잘해봐야 대단한 성과나 보상이 뒤따르지도 않으면서, 못하면 금방 티가 나는 일들. 열심히 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노고에 대한 감사나 칭찬이 아닌 반찬 투정이나 들어야 하는 일들.
선택해야 했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주눅 든 채 하루를 낭비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도 나를 잘 달래서 이 하루를 건질 것인지. 나는 냄비밥 하수로 머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타인의 인정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저 냄비밥을 잘하고야 말겠다는 생각만 했다. 뭘 어떻게 해야 결과물이 좋아질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 뒤, 나는 쿠쿠가 한 것처럼 고소한 밥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맡은 수많은 허드렛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지니려고 노력한다. 서투른 몸짓으로 스치는 곳마다 흘리고 떨어뜨리고 흐트러뜨리는 아이들은 계속해서 허드렛일들을 만들어 낸다. 정리해봐야 한 시간이면 또 어질러질 공간이지만, 그래도 나는 쾌적함을 좀 더 맛보기 위해 그들의 뒤를 밟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쓸고 닦고 정돈한다. 아침이면 출근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아이를 싣고 놀이터와 도서관을 부지런히 넘나들고, 다녀와서는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을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내 할 일을 훌륭히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엄마의 수고를 알 리가 없는 철딱서니 꼬마들은 자주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리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멋지게 내 일을 해냈는지.
물론 사람이 살려면 인정과 보상도 적당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타인의 인정이나 외적 보상에만 의존해서 살라고 조언하는 정신건강 전문가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내 손안에 있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덤덤히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 그러면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자신의 내면과 성장하는 실력을 음미해 보자. 훗날 이 시기를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선물처럼 달콤한 인정의 말이 들려오기도 한다. 엊그제 주방을 어슬렁 거리던 남편이 내가 해둔 냄비밥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이야. 이제 냄비밥 달인이 되었구먼. 완벽하다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