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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Nov 12. 2022

함부로 미안해하지 말 것

엄마의 죄책감

  우리 첫째는 엄마 껌딱지가 된다는 재접근기에 아우를 봤다. 그나마 낮 동안에는 엄마 없이 잘 지내지만 밤만 되면 아기 캥거루처럼 내 품을 찾는다. 엄마 손을 애착 인형 삼아 조물조물해야 잠이 들고, 자면서도 레이더를 가동하여 엄마가 자리를 뜰 때마다 기가 막히게 울음을 터뜨린다. 남편이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엄마인 척 옆에 누워봐도 소용없다. “날 속이다니!” 하는 분한 마음까지 보태서 더 크게 운다.


  참고로 우리 첫째는 목소리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목청도 좋고 뱃심도 센데 아직 음량 조절하는 방법은 잘 몰라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를 낸다. “응애응애”하는 신생아의 가녀린 울음소리는 둘째를 낳고서야 처음 들어봤다. 첫째는 신생아 때도 “꺄아아아악!” 하고 샤우팅 창법을 구사해서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밤마다 마음을 졸이곤 했다.


  며칠 전 둘째의 황달이 심해져서 하루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첫째가 마음에 걸려 입원을 주저하자, 조산원 측에서 다른 입원 환자가 없으니 아이가 시끄럽게 해도 괜찮다고 배려를 해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밤중에 수유를 하러 자리를 비운 30분 동안 첫째가 대성통곡을 했다. 오열하는 첫째와 발바닥까지 노래진 둘째를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전부 다 미안하고 전부 다 내 탓이오. 미안함과 후회와 자책감이 뒤엉켜서 무거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엄마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아이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부족한 점만 보인다. 별 게 다 미안하고 별 걸 다 반성한다. 여태껏 이것이 당연한 모성인 줄 알았다. 그렇게 죄책감으로 무장하면 스스로를 채근하여 좀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미안함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이걸 벗어던지면 모성도 함께 날아갈까 봐 죄책감이 마음에 고이도록 내버려 뒀다.


  하지만 겪어보니 지나친 죄책감은 반성과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나 자신을 우울감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미안하면 담백하게 사과하고 잘못을 고치면 그만인데 거기에 내 멋대로 애잔함과 슬픔을 흘려보냈다. 그림자가 드리운 엄마의 억지웃음이 아마도 아이는 어리둥절하고 불편했을 테다. 더 이상 내 속이 복잡하다고 아이에게까지 질척거리는 감정의 짐을 지울 수는 없다.


  애틋한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는 독이 된다. 괜찮은 아이가 불쌍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가 딸을 짠하게 봄으로써 씩씩한 아이를 불쌍한 아이로 만들었다. 엄마가 ‘아이고 장해라’ 하는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짠한 것’ 하면서 애잔한 마음으로 대한다. 아이는 엄마한테 기쁨의 에너지를 받는 게 아니라 불쌍하고 짠한 에너지를 받는다. 그 딸은 짠한 냄새를 풍기면서 살게 된다.

    윤우상, <엄마 심리 수업> 중 발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의 죄책감으로 멀쩡한 아이를 짠하고 병든 아이로 만들고 있었다. 엄마의 병든 죄책감은 아이를 죄인으로 만든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엄마를 괴롭게 만든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죄책감의 모성을 멈춰야 한다.


  미안해하는 엄마가 좋은 엄마라는 메시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에 스며 있었다.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모성의 본질인 양 말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그렇게 미안해야 할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를 먹이고 사랑하고 키워냈다. 나의 엄마도, 그리고 엄마인 나도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하다.


  이제부터는 아이를 대하는 눈빛, 표정, 말, 목소리에서 불필요한 짠함과 미안함은 빼버리려 한다. 아이에게 실수를 하면 사과하고 개선하되 면죄부를 얻고자 함부로 미안해하지는 않겠다. 짠함 대신 대견함, 미안함 대신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 표지 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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