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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Dec 15. 2023

심리 전문가도 망태 할아버지 찾는 날

  생떼 시기를 지나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첫째를 보며, 자식 키울 맛 난다고 느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말 꺼내기가 무섭게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바로 징징거림의 시기. 제법 어린이답게 말을 할 줄 아는 첫째는 이제 막무가내로 드러눕진 않는다. 그리고 뭐가 불편한지 제 수준에 맞게 말로 표현할 줄도 안다. 아예 속을 모를 때보다야 덜 답답해서 좋은데, 문제는 어조가 죄다 칭얼거림이다. 아직 불편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많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둘째가 폭풍 성장하여 온 집안을 쏘다니다 보니 첫째는 속상한 일이 많아졌다. 하긴 세 돌도 안 된 누나 입장에선 어디서 공룡새ㄲ.. 아니지 새끼 공룡 같은 게 나타나 장난감에 침 묻혀, 블록 망가뜨려, 머리끄덩이 잡아. 미칠 노릇일 게다. 이렇다 보니 둘째 가시는 걸음마다 첫째의 징징거림이 보태어지는데, 둘째 녀석이 하루에 몇 만 보는 족히 걷는다. 그래서 요즘 우리 집 배경 음악은 곡소리가 되었다.


  오늘은 남편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친정에 빌붙어(큰 절 받으세요) 가정 보육을 하고 있다. 몇 시간 잘 논다 했는데 어김없이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야 심리학 전문가 유후 문제없지. 아이의 욕구를 파악하고, 감정은 허용하되 행동은 교정해 주면 된다. 말은 짧고 간결하게, warm and firm 느낌 아니까.


  분명 계획은 이랬는데 행동은 좀 엉뚱하게 나갔다.


조용히 해! 자꾸 울면 산타할아버지한테 전화한다! 울고 떼쓰면 선물 안 주신댔어! (+부리부리한 눈, 엄한 표정)


  여기서 끝나면 싱거울까 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하는 시늉까지 했다.


아 네 선생님. 우리 땡땡이 잘 지내고 있어요. 네네. 어휴 그럼요. 떼도 안 쓰고 잘 있어요. (연기 천재. 자연스러웠어.)


  아이의 감정을 억압하고 공갈로 협박한 것도 모자라 사기까지 처먹은 전문가의 위엄을 보라. 비록 아동의 심리 성장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되었겠지만 적어도 양육자들의 청력은 건졌다. 일단 애미가 살고 봐야지… 휴 전문가도 고막은 방음이 안된다고요.


  이 모습을 보신 우리 친정 엄마께서 웃으며 한 말씀하셨다. “야 전문가도 별 수 없다ㅎㅎ 산타 할아버지에 선생님에 다 등장하네.”


  맞다. 이론 중요하지. 이론 너만큼은 바람직해야지. 그래야 너를 나침판 삼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맨날 애랑 씨름하다 보면 열 이론보다 한 망태 할아버지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더라. 저명하신 심리학자들께서도 이 세상에 완벽한 양육자는 없음을 인정하셨다(나는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너무 완벽해지지 않도록 절제하는 거라며 위로를 해본다).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 옳은 길로 가는 날이 헤매는 날보다 좀 더 많아지게끔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닐까? 평소에 쌓아둔 사랑이 있으니, 훗날 아이들도 오늘의 사기 공갈 협박은 해프닝 정도로 웃어 넘겨줄 거라 믿는다.


 * 물론 상식 자체가 온전치 않으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이므로, 자신의 상식이 참 상식에 가까운지 검증해 볼 필요는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또 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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