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감정 이야기 [2]
건강한 마음을 위한 소식지, 누스레터입니다.
지난주 누스레터에서는 감정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은 감정, 나쁜 감정보다는 상황에 마땅한 감정이 있다고 했지요.
-지난 글 ⬇️-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연 감정은 언제나 어디서나 마땅할까요?
당시에는 적절한 감정이었을지라도,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변한 후에는 사정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A 씨의 아버지는 상당히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A 씨는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까 봐 벌벌 떨었습니다. 행여나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순간부터 바짝 긴장해야 했지요. 아버지 앞에만 서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갔어요. A 씨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곧 법이었어요. 아버지가 한 번 말씀하시면 엄마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A 씨 역시 원래 말을 곧잘 하는 아이였지만,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입이 얼어붙었습니다. 찍 소리라도 냈다가는 말대꾸를 한다고 몇 배로 얻어맞았거든요.
세월이 흘러 아이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였습니다. 남편은 좀 무뚝뚝하긴 했지만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A 씨는 남편과 대화하는 일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회사에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가 하얘졌어요. 부부가 상의할 일은 무척 많아요. 여름 휴가지 선정부터 자녀 계획까지, 주제도 천차만별이지요. 그런데 남편의 의견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A 씨의 마음은 확 무너져 내렸어요. 남편을 도저히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아예 말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지요. 남편이 조금이라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 A 씨는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불안해졌어요. 처음에는 남편도 그런 A 씨를 안심시키며 위로했지만, 자꾸만 이런 일이 반복되자 유약한 아내를 대하는 일에 점차 지쳐 갔어요. (사례는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A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무력감은 마땅했습니다. 신변을 위협하는 대상 앞에 서면 누구나 공포를 느끼지요. 그러한 공포의 대상을 거역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어린 A 씨는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아직 약하고 무능한 어린아이에게는 부모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요.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해도 말이지요. 벗어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A 씨는 무력하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폭력을 당해오며 익숙해진 두려움과 무력감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상황도 사람도 바뀌었지만 감정은 바뀌지 않았어요. 남편은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존재임에도, 그리고 A 씨는 더 이상 무능하고 약한 아이가 아님에도, 감정은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예시를 들긴 했지만, 이런 일들은 꽤나 흔합니다. 정서에 깊이 각인된 강렬한 경험은 일종의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사건이 생애 초기에 일어났을수록,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되었을수록 경험은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이전의 경험을 상기시킬 만한 일이 발생하면 그때의 정서, 생각, 대처 행동 등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지요. 하나의 패턴처럼 말이에요. 문제는 더 이상 그 패턴이 새로운 상황에 들어맞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일어나요. 알아차린다 한들 몸에 밸 정도로 굳어진 패턴을 혼자 힘으로 바꾸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부분 심리적 상처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들춰내서 직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작업해야 합니다.
감정은 대체로 이롭지만, 깊이 상처가 났을 때에는 삐걱거리기도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낀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릅니다. 상황도, 사람도 변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누스 레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한 주도 마음-안녕히 계세요.
* 마음 살피기
평소 나답지 않게 과민반응할 때가 있나요?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거나 불안하거나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 때/무슨 말을 들었을 때였나요?) 삐걱거리는 감정을 바로잡기 위한 힌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p.s/ 정신 건강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마음 살피기 활동 내용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답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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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us는 그리스어로 정신, 마음의 태도를 뜻합니다.
** 보건복지부 공인 정신건강임상심리사 1급, 한국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Leslie S. G. & Sandra C. P. <심리치료에서 정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