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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Jul 26. 2022

“카”에서 “머리카락”까지

말 배우기 과정 엿보기

  아이가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다. 재미있는 건 말이 길어지면 그중에 본인이 알고 있는 표현만 콕 집어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것 때문에 요즘 웃을 일이 많다.


  며칠 전에 남편이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여기 양이랑 양치기가 있네~”라고 했다. 그랬더니 “양치”라는 말만 얼른 알아듣고는 검지를 입에 넣어 치카치카 이 닦는 시늉을 한다.


  한동안 공원에서 땅에 떨어진 쓰레기나 나뭇잎만 보면 주워서 손에 꼭 쥐고 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뭐든지 입으로 가져가는 구강기의 절정이던 때라 “먹으면 안 돼”라는 잔소리를 달고 다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 말 떨어지자마자 꼭 손에 있던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자기가 알고 있던 “먹으”라는 말만 쏙 뽑아서 행동으로 옮겼던 것 같다.


  하루는 아이와 함께 아기 돼지 삼 형제 그림책을 보다가 내가 “어라? 근데 여기 아빠 돼지는 없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소파에 누워있던 아빠를 가리키며 “아빠 아빠”하며 아빠 돼지가 여기 있음을 알려… 아 이건 정확히 이해한 걸로 인정해줘야 하나? 어쨌든.


  말을 할 때도 제 딴에는 단어가 길고 어려운지 만만한 글자 하나씩만 따서 말한다. 예컨대 에어컨은 “컨”, 가방은 “가”, 평안이(둘째 태명)는 “팡”, 머리카락은 “카”이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딱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만큼만 듣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모습이 참 신통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지식 습득의 과정이 이랬던 것 같다. 새내기 학부생 시절, 처음으로 심리학 개론을 들었을 때에는 이론들의 이름과 정의 정도만 익혔다. 그러다 전공과목에서 이 내용을 확장시키고, 이후에 실제로 일을 하면서 그 개념을 더 심도 깊게 팔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카”만 따라 하다가, 점점 “머, 리, 락”을 익히고, 숱한 연습을 통해 마침내 유창하게 “머리카락”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학습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처음부터 머리카락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용례에 맞게 사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른들의 착각이자 과욕이다. 사실 나부터가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머리로는 과도한 주입식 선행 학습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무언가에 못 미치고 더딘 것을 불편해한다. 타고난 기질의 탓도 일부 있겠지만, 빨리 배우지 않고 빨리 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에는 아마도 우리의 교육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배움의 과정을 충분히 즐겨 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낯선 것을 더듬어 가며 조금씩 익숙해지는 그 과정이 즐겁다기보다는, “아직도 서툴다”는 쪽에 늘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러니 아이가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낚시를 해다가 생선 가시까지 발라서 먹여주고야 만다. 아이 입장에선 스스로 해보려고 했던 일에 누군가 초를 치는 느낌일 것이다.


  나 역시 조바심을 다스리지 못해 초를 칠 때가 한두 번이겠냐마는,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아이가 경험하는 그 신비로운 배움의 과정을 지켜봐야겠다. 비록 내겐 익숙지 않은 느긋함이지만 더듬더듬 “머리카락”을 연습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 사진은 우리 아기의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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