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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Oct 11. 2018

핸드폰 없이 살아보실래요?

포노사피엔스*의 타의적 노(NO) 폰 라이프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

“헉, 오후 1:40분!!”


소개팅 남을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제야 일어났다. 아무리 밤을 새웠다지만 그래도 날이 밝으면 정오쯤에는 눈이 떠지겠지 했는데 여독까지 겹쳐 정신없이 잤나 보다. 휴대폰이 없으니 알람도 없다. 서둘러 소개팅남에게 PC카톡을 켜서 메시지를 남겼다. 남자는 아직 출발을 못 하고 있었다. 정확한 장소도 오전에 일러주겠다고 했었는데 약속 시각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거듭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한 시간 후로 시간을 늦춰 만나기로 했다. 전날엔 어떻게 알아보냐는 말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검정 가방을 들고 있겠다고 말했는데 상대방은 크게 웃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나는 노트북을 들고 당당히(?) 서 있었고, 와이파이 연결이 안 돼 무용지물이었지만 다행히 남자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강제로 핸드폰 없이 살기를 체험 중이다. 열흘 정도 됐으니 느낌상으로는 기아체험이나 국토대장정에 견줄 만한데 그것마저도 익숙해졌고, 이제 막바지 체험 구간에 다다랐다. 여행에서 분실한 휴대폰이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 임시폰 없이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오히려 나보다 가족과 친구들이 더 불편함을 호소해 예전에 쓰던 깨진 아이폰4라도 쓸까 싶어 충전하려고 보니 충전 부분이 왜 이렇게 넓은가 싶었다. 이런 충전기도 있었던가.

연락은 카톡이나 이메일로 가능하니 노트북이 더 중요해졌다. 스마트폰이 없을 땐 노트북 가치가 지금보다 높았었지, 별로 오래되지도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약속장소에 기다릴 땐 정말 오랜만에 잡지도 들여다봤다. 실물 잡지라면 KTX 안 갇힌 공간에서 KTX매거진을 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친구를 기다리느라 카페에선 라이프 패션지를 꺼내 읽었다.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전엔 꽤 오랫동안 잡지 <코스모폴리탄>을 매달 사봤었지. 오랜만에 이달의 편집자 글과 특집기사, 인터뷰 기사를 읽다 보니 친구들이 좀 늦게 왔으면 할 정도였다. 생활의 자투리 시간을 스마트폰이 메워주고 있으니 잡지 따위는 들어올 공간이 없어졌구나. 내가 <코스모폴리탄>을 자연스럽게 그만 사보게 된 것도 잡지사의 매출 부진 트렌드와 시기를 같이 했을 즈음이고.

핸드폰이 없는 동안 옛날(?) 기억을 여럿 더 떠올릴 수 있었다. 휴일 오전, 외출 전에 동생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동생이 좋아하는 강된장을 만들어놨는데 어제 새벽에 귀가한 동생을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고 이따 챙겨 먹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 평소라면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겨놓을 테지만, 나에겐 휴대전화가 없다. 메모지에 써서 눈에 띄는 곳에 두는 수밖에 없다. 작은 메모지는 혹시 못 보고 지나칠까 봐 굳이 A4 용지를 찾아 큼지막하게 써두었다.


‘강된장 냉장고에 있음. 달걀과 비엔나소시지도 있음.’


쓰고 나니 더 웃겼는데 내가 초중고 학교 다닐 때 엄마가 이런 마음으로 식탁에 메모를 썼을까 싶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도 생각났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약속 장소에 갈 때는 위치와 가는 방법을 미리 파악해두어야 한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온 다음 세 번째 건물의 5층, 브런치 카페 C’


7번 출구임을 계속 되뇌었다. 스마트폰이 있다면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린 다음 검색해도 아무 문제없던 일을 출발 전부터 신경 써 기억했다. 혹시 몰라 (평소와 달리 일부러) 넉넉하게 출발했으니 약속시각 전에는 분명 도착할 터였다. 나가는 길엔 귀찮아서 굳이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는) 시계도, 거울도, 펜과 메모지도 챙기지도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정차하는 곳마다 역명을 확인했다. 암기 능력이 향상할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한가한 카페에는 시계가 없었다. 점원에게 시간을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재빨리 앞치마 주머니 깊숙이 들어있는 ‘개인’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주었다. 다행히 약속시각 십 분 전이다. 지각쟁이가 핸드폰이 없으면 지각도 자제하게 된다.

십 분쯤 지나고선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잡지를 꺼내 읽었다. 일행들이 빨리 올까 봐 서둘러서 먼저 훑어 읽고, 다시 천천히 차근차근 읽었다. 사십 분은 족히 지난 것 같아 점원에게 물어보니 어쩜, 정확히 사십 분이 지났다. 운전해서 오는 친구는 혹시 사고라도 났나 걱정이 되어 초초해졌고, 약속장소가 여기가 맞는지 열두 번은 더 되짚었다. 전화만 되는 일반 휴대전화 시절도 아니고, 삐삐 시절로 혼자 돌아간 듯했다. 카페 직원에게 전화를 써도 되겠냐고 부탁했다. 달랑 두 개 외우고 있는 가족의 휴대전화 번호를 거쳐 친구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고, 5번 만에 결국 전화를 받은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둘 다 늦는다고 카톡으로 얘기를 해놓았고, 내가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고 했다. 일단 안심은 했지만, 울분이 났다. 친구들도, 카페 직원도, 가족도, 아무도 애타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만 애가 닳았다. 시공간의 간극이 생긴 기분이었다. 스마트폰이 신체 일부로 자리 잡았다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ce)’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폰이 없는 포노 사피엔스는 불편함은 감수한다 치더라도 각종 대화에서 늘 뒤늦게 참여하며 소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응답하라> 시절에 발 한쪽을 들여놓은 것 같았으나 그 향수를 채 다 느끼기도 전에 고립감을 앞세운 불편함이 노 폰 라이프를 방해했다.

사실 불편함도 일주일쯤 감수하다 보니 적응이 돼 버스가 언제쯤 도착할 지, 누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는지, 오늘 하루 날씨가 어떨지 등 굳이 확인하기를 단념했지만, 일부 결제나 특정 메시지 확인, 선물 받은 이모티콘, 기프티콘 확인 등은 모바일 전용으로만 확인 가능한 플랫폼들도 많아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불편함을 절감했다. 아, 그리고 유명인이 눈앞에 있을 때 핸드폰이 없어 사진 찍자고 할 수가 없었던 것도 꽤 아쉽긴 했다.
 
핸드폰이 없으니 세상과 조금은 거리감을 둔 기분이 들어 그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타인의 연락에도, SNS도, 세상일에도 조금은 거리를 두고 나를 좀 더 챙기는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스마트폰을 필두로 너무나 앞서나간 세상을 살기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뱁새의 가랑이가 찢어지는 듯한 기분을 종종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머리를 쉬게 해주는 일도, 몸의 긴장을 풀고 이완해주는 일도 필요하다. 핸드폰이 신체 일부가 된 포노사피엔스라 하더라도 하루 중 잠시 팔다리를 내려놓듯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으면 휴식다운 휴식이 찾아온다. 하지만 역시 포노사피엔스답게 하루 이상은 각종 부작용을 초래한다. 오히려 일주일 이상이라면 편안함의 구간에 다다를 테지만 이내 다시 소외감에 빠질 수 있으니, 휴대폰은 최대한 잃어버리지 않고 스트레칭하듯 하루에 손에서 놓을 수 있는 시간을 늘려보는 게 가장 현명할 듯하다. 결론은 핸드폰 간수를 잘 해야겠다, 그리고 포노사피엔스 인증.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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