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다. 바로 우리가족이다. 요양원은 인생 마지막 정거장으로 그곳에 가시게 되면, 상실감에 몸을 떨게 될지 알았다. 그런데, 엄마의 인생학교가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아플때도 고통을 참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과 비교한다면, 24시간 간호사가 상주하고 언제나 관심을 갖고 어디 아픈지 물어주며, 고국을 떠난지 30여년만에 한국말 돌봄을 받게 되니, 엄마는 그야말로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고 새학교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산책중에 전화가 왔다. 막내동생에게서다. 엄마 요양원에서 자리가 났다고 곧 들어오셔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들어오기 전에 코빅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결과가 나오면 24시간 이내에 입주해야 하니, 앞으로 며칠 내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산책하다가 말고, 바로 되돌아가야 하나, 엄마한테 빨리 가봐야하는 것 아냐? 내가 빠져도 가게 운영엔 큰 무리가 없나, 한꺼번에 생각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일단 전화로 남편에게 상황을 알리니 엄마를 보러 내려가보란다. 이번에 내려가면, 엄마를 요양원에 입소시키기까지 해야 하니, “올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요양원 신청서를 넣은 것은 작년 11월경, 8개월에서 1년 걸린다고 했는데, 생각외로 빨리 나왔다. 그간 엄마가 고통으로 힘들어하실 때마다, 빠르게 갈수 있는 일반 요양원 자리라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엄마와 의논하기도 했다. 엄마는 예전에는 자신이 치매라든지, 힘들어질때 요양원에 꼭 넣으라고 말씀하셨었지만, 정신이 말짱하기시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가시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가장 원하고 우리도 안심하고 엄마를 맡길 수 있는 한인요양원 한곳만 신청서를 넣었다. 한인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요양원이어서 그곳 이외의 곳으로 가야하는 것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하셨다.
다행이도 “무궁화 한인 요양원(Rose of Sharon Korean LTC)”으로 들어가시게 된 것이다. 나는 산책길을 조금 더 걷다가,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는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들어가게 됐다고 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고 말하신다. 내가 마무리하고 오늘 늦게라도 엄마집에 갈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시라고 말했다. 바로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서 토론토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게 지지난주 화요일이었다. 테스트를 그 다음날 받는다고 해도, 결과가 나와야 하고, 언제 들어가게 될지 긴가민가 하였다. 동생이 요양원측과 이야기한 결과, 결과는 아마도 그 다음날쯤 나올 거라며, 금요일 오전에 입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내려가고, 동생은 그 다음날 오전에 오기로 했다.
엄마는 당신의 짐을 이미 다 싸놓으셨다. 우리들에게 한번 더 보여주고, 의논한뒤 결정을 하시겠다 하셨다. 엄마짐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인조견으로 만든 “사리마다” 바지들이었다. 분홍색, 흰색등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이 필요하냐는 말에 엄마는 짐도 안되고, 요즘에는 돈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했다. 한복 속치마등을 잘라 직접 지은 것도 몇개 된다. 바지안에 입는 바지같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알수는 없지만 엄마의 “사리마다” 사랑은 극진했다. “사리마다”는 일본말로 속옷을 뜻하는데, 엄마의 “사리마다”는 그냥 한국말처럼 들리고, 여름엔 그것만 입어도 괜찮을, 통넓은 속바지라고 볼수 있다.
엄마는 다른 어떤 옷이나, 잡동사니들은 거의 버려두고 가셨다. 그곳에 가면 다 필요없다는 말씀이셨다. 집안에 걸려있는 가족들의 액자부터 시작해서, 사진 한장 들고가지 않았다. 오로지 한장있는 사진은 엄마의 지갑속에 있는 아버지 사진뿐이었다. 사실 가족이 너무 많아서 누굴 빼고 챙길 수도 없고, 공평하게 그리 하시기로 한것 같다.
이미 다 싸놓은 짐외에 다른 짐들은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간 다음에 남은 가족들이 처리하리라 계획했었는데, 막내가 오면서 전선이 뒤집혔다. 막내는 이틀간 엄마와 지내면서 시간을 알뜰하게 쓰기로 작정했는지, 엄마의 모든 짐을 다 풀어내며, 다시한번 엄마에게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져가지 않기로 한 물건들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필요없는 것은 쓰레기로, 쓸만한 것은 짐으로 분류하여 한쪽편에 싸놓기 시작했다.
나와 엄마가 아무리 말려도 막내가 듣지않아, 결국 함께 그일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느라고, 모두 지쳐갔다.
그리고 엄마 통장 관리를 위해서 재정대리인 사인을 맡아놓고, 인터넷 뱅킹도 해야 해서 엄마를 모시고 은행에도 갔다오고, 전화, 텔레비전, 에머전시 연락팔찌 등 자동이체 되는 것들을 일일이 해지해야했다. 아파트 관리인에게도 엄마의 입주를 알려주니, 요양원 입주서류와 함께 아파트 계약해지를 작성해달라 했다. 2달 여유를 줘야 하니, 2달간은 아파트 렌트비가 나가게 된단다. 그런 일이 상당히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 그런 일에 능통한 막내가 다 처리해주니 다행이었지만, 엄마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시간을 사용하고 싶었던 나의 바램과는 멀어져만 갔다.
나는 온가족들과 줌 미팅을 열어 엄마 요양원 들어가시는 작별인사를 하게 하나, 혼자 가늠해보기도 했는데, 가시기 전날까지 짐더미에 파묻혀 있어서 생각을 접었다. 이번 엄마 요양원을 보내면서, 일처리하는데 막내와 나의 다름이 정말로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엄마는 막내는 억척스런 자신을 닮고, 너는 느긋한 아버지를 닮아 그렀다고 하셨다. 자신을 닮긴 했지만, 엄마도 막내의 다그침에 헉헉 소리를 낼 정도가 됐다. 엄마가 가장 힘들어하셨던 것은 영상통화만 하던 스마트폰을 전화기로 사용할 수 있게 가르쳐드리는데, 잘못 만지면 스마트폰의 화면이 바뀌고, 어느곳을 눌러야 할지, 밀어야 할지 속성 컴퓨터 레슨에 엄마가 지쳐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스마트폰은 그동안 배워온 동영상 통화만 하기로 했다. 그래도 배워보려고 귀를 기울이시는 모습이 안타까왔다. 긴장된 시간이 지나자, 풍랑이 잦아들듯, 조용해지면서 엄마와 막내가 다시 부드러워지는 걸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엄마뱃속에서 나왔지만, 정말 다르다 다시한번 느꼈다.
막내의 엄마사랑은 또한 특별해서, 엄마가 요양원가는 것을 싫어할 때부터 주장해왔고, 이번에도 막내가 관계기관도 밀접히 연락하며, 이 일을 주도해왔다. 때때로 막내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않기는 했어도, 원래 "대답만 하고 말을 들어먹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 일을 같이 해내느라 나도 혼났다. 나는 엄마가 가시고도 2달이나 시간이 있는데, 왜 그리 서두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에 쪼들리는 그애의 삶의 스타일이니 어쩌겠는가? 그애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손발을 맞춰주느라 땀깨나 뺐다.
그날 큰언니 형부가 방문했었다. 마침 아파트에서 엄마를 돌봐줬던 벨마(사회복지사)가 오기로 되어있어서 여러 사람이 있어서 어떻하냐고, 걱정되는 말을 했더니, 형부는 밖에서 언니를 기다리겠다고 발길을 돌리셨다. 언니도 아픈 뒤로 엄마집을 처음 방문하는 귀한 시간이었는데, 느긋한 만남이 될수 없었다. 조앤언니도 엄마를 보러 오려고 했는데, 정부의 “Stay Home” 재난문자를 받았다고 연락이 와서, 오지말라며 주저앉혔다. 엄마를 자주 방문했던 조카도 전화가 와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려 잠시 들려도 되냐고 했는데, 올 필요없다고 잘라 말했다. "코로나 포비드" 때문에 자유롭게 인사를 받지못했다.
나중에 이런 모든 일처리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 장모님, 할머니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나와 막내는 “선택받은 자”로 엄마집에서 장구치며 북치며 엄마와 시간을 보냈지만, 멀리서 엄마를 보내는 착잡한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시간은 없었다.
아파트에서 돌봄서비스를 맡아해주던 벨마가 와서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홍권사님이 방문하여 잠시 만남을 가졌다. 그분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시고, 멀리서 잘가시라며 두유 가루 한상자를 전해주고 가셨다.
엄마가 요양원 신청했다고 했을 때 “그런 데 가면 매맞는다는데, 왜 가시려고 하느냐?”고 물었던 옛 친구에게 가게 됐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들어가기전 인사를 하고싶은 분들에게는 전화로 알려드렸다. 모두 요즘 요양원 자리가 나지 않는다는데, 잘됐지만, 얼굴도 못보고 보내게 되어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들해주셨다.
어쨋든 요양원 입주날이 돌아왔다. 엄마는 조앤언니가 보내준 옅은 분홍색 누비 한복 세트를 입으셨다. 그전날 막내가 엄마 파머를 해주었고, 요양원가시는 분답지 않게 너무 깨끗하고 예쁜 할머니였다. 엄마는 같이 아파트에 살던 어떤 치매환자가 요양원으로 떠나는데, 온가족이 와서 휠체어에 앉혀서 풍선달고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떠나는 걸 봤는데, 좋아보였다고 말씀하신다. 한 아파트에서 조금씩 안면을 트고 살았던 한인들이 자신이 소리소문없이 없어진 걸 알면, 죽었나 할지도 모르겠다며 씁쓸해하셨다. 나중에 우리가 엄마집을 정리할 때 한분이 다녀가셔서 엄마의 요양원 입소를 알려주었다.
엄마의 입소는 조금은 축제같은 느낌이 있었다. 엄마의 건강이 최악이 되기전에 들어가시게 되어, 가져갈 물건을 엄마손으로 골랐고, 나머지 물건 정리는 자식들이 해주면 되니 말이다. 아파트 관리자였던 프랭크와는 25년 이상 한 아파트에 살면서 정이 들어 떠나기전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짐을 싣는 곳으로 프랭크가 찾아왔다. 그가 엄마에게 휴대폰을 보여줬는데 그곳에는 “안녕히 가세요. 행운을 빕니다” 이런 한글이 들어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엄마를 꼭 안아주며 잘가라고 말해주었다. 엄마와 프랭크와는 우리가 모르는 우정이 있는 걸 느꼈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잘가라는 말을 해주었다.
입소하는 날, 그날까지 온라인에서 테스트결과를 확인하게 되는데, 엄마와 동생은 음성이 나왔는데, 내 테스트 결과는 나오지 않았었다. 요양원에서는 일단 와보라 하였다.
나는 1층 접수실에서 코빅 테스트를 따로 받았다. 한국에서 들여온 검사기로 15분 후면 결과를 알수 있다 하였다. 엄마와 동생은 엄마방으로 먼저 올라갔다.
1층에서 기다리면서 접수를 하게 됐다. 온타리오 요양원 제도는 일반실, 세미특실, 특실로 나뉜다. 일반실은 노인들에게 나오는 정부연금으로 거의 충당이 되는데, 조금 부족한 부분은 정부에서 보조해준다. 그 가격이 1,900달러이다. 일반실은 몇명이 거주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세미특실이 있는 것으로 봐서 3명 이상이 함께 사용한다 싶다. 세미특실은 2명이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2,300달러로 알고있다. 그리고 특실은 2,700달러이다. 코로나 관계로 다인실이었던 일반실에 2명으로 인원을 줄여나가는 중이라는 담당자의 말도 있었다. 연금으로 충당하고 부족한 돈은 개인적으로 납부해야 한다. 엄마는 1인실을 가게 됐다. 자녀가 많으므로, 엄마의 부족한 요양비를 모아서 내기로 했다. 모든 요양원이 같은 가격으로 운영된다. 영리단체와 비영리단체로 나뉘어지며, 무궁화 한인 요양원은 비영리단체이다.
엄마는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또 본인의 집에서 자식들이 찾아오면 맘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요양원을 맘놓고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갈수록 약해져가는 건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었다. 자식들이 많으니, 엄마를 조금씩 도와주는 것에 엄마가 너무 신경쓸 필요없다고 말해도, 엄마는 듣는둥 마는둥 했다. 그런데 "다른 가족중에 힘든 사람이 생기거나 하면, 내가 책임질테니, 엄마 걱정하지 마시라 "고 말해주는 미국에 있는 딸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는데, 최근에 많은 돈이 벌리고 있다며, 일반실에 자리가 나도, 1인실에서 계속 지내시라고 신신당부하니, 그제서야 엄마 얼굴이 펴지는 걸 보게 됐다. "돈" 걱정 때문에 가고싶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같다.
엄마의 요양원은 과연 어떻게 생겼나, 계속 이어서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