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팔로는 엄마를, 왼팔로는 아버지를 끼고, 그 두 손을 깍지껴서 단단히 잡고 신이나서 시골길을 걷는 젊은 내가 보인다. 내게 그렇게 사랑스런 모습이 있다니, 나도 놀랍다. 옆에는 기분좋게 웃는 아빠가 있다. 젊은 엄마는 아줌마 파마머리에 세로 무늬 원피스를 입고계신다. 지금 모습과 많이 달라보인다. 엄마는 나중에 전체틀니를 하시고 나서, 인상이 바뀌신 것 같다. 익숙해서 그런지, 옛모습보다 지금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내 뒤쪽으로는 우리 셋 사이엔 끼지 못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관심에서 밀려난 것이 서러워보이는 큰조카가 있다.
입고입는 옷으로 보아하니, 대학교 2학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첫번째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안고 귀촌했었을 수도 있다. 그 당시에 장학금 받기를 속으로 엄청 기도했었다. 빠듯한 생활에 대학경비를 대는 부모님에게 기쁨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기도덕인지, 간신히 장학생 명단에 들어서 그 돈을 드렸을때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결국 그 장학금으로 아버지는 내 책상을 사주셨다. 그리고 그 책상을 "이교수 책상"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엄마를 통해 들었다. 엄마의 전언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아빠의 꿈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리진 못했지만 "아버지의 귀중한 딸"임이 자랑스럽다. 언제나 "중간정도" 평범한 딸을 아버지는 무얼 보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집에서 가져온 여러 사진중에 이사진이 있어서 자꾸 들여다본다. 이 사진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지금도 생각나는, 마음에 드는 노란색에 검은 줄이 있는 꿀벌 색상의 얇은 스웨터 때문이다. 나중에 캐나다에 와서 비슷한 디자인의 스웨터를 산 적이 있는데, 그때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덕에 잠시 회상에 빠져본다.
엄마는 달랑 한장의 사진만을 갖고가셨기 때문에, 모든 사진은 우리들이 처분(?)해야 했다. 엄마손으로 현상한 사진은 단 한장이나 있을까? 모두 가족들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의 순간들을 담아서 사진으로든 액자로든 보내주었다. 그러니, 각자의 집에도 한장씩은 있는 사진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엄마의 여행사진, 교회에서 찍은 사진 등도 있었다. 액자속 주인공에게 돌려줄수도 없고, 그들이 없는 데서 사진들을 없애버린다. 사진을 없애는 것이지, 추억을 없애는 건 아니다. 어떤 사진은 이번 걸름에서 건져졌지만, 나중에 내 물건을 정리할 때가 되면 다시 버려질 운명이 될 것이다.
엄마는 마지막 인생학교를 들어가면서, 경제적인 능력과, 건강에 대한 결정능력 등을 자식들에게 이양한다는 사인을 하셨다. 아직 그런 것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선 요양원에 들어가는 비용등을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해서, 엄마의 권한이양에 대한 사인을 받아놓았다.
그리고 요양원에서는 모든 생활용품을 다 갖추어놓아서 당신이 돈을 쓸 일은 없다면서, 돈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간혹, 잠옷바지 안쪽에 천을 대고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안에 돈을 가져오시는 분이 있는데, 빨래하다가 그 돈이 발견되는 에피소드도 있다면서 현금은 전연 필요하지 않다 하였다.
요양원 들어가는 날, 엄마의 지갑에 있던 현금 145달러를 꺼내더니, 막내딸에게 주었다. 나는 잠시, 왜 내게는 안주고 농담할뻔 했는데, "내 머리 파마해준 값이다"라고 하면서 주더라. 나도 동생에게 그날 같이 파마를 했는데, "엄마 돈으로 내것까지 계산하자" 그렇게 엉겨붙었다. 어쨋든 이제 엄마는 통장은 있지만, 그 돈 모두 요양원 비용으로 들어갈 것이고, 부족한 것은 자식들이 모아서 내기로 했으니, 엄마는 무일푼 생활자가 되셨다.
엄마는 캐나다에 처음 와서 돈이 너무 없을때 김치를 담가서 바로 냉장고에 넣었다고 하셨다. 그러면 자식들이 김치가 익지않아 맛이 없다고 할때마다 마음이 뜨끔했었는데, 김치 먹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일부러 맛없게 하기 위해서 익히지 않았었다고 하셨다.
엄마가 김치를 담가 팔기도 했고, 만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주문받아 팔아주기도 했는데, 그 만두가 비싸다고 불평했던 생각을 하면 엄마께 죄송하다. 내가 만두를 만들어보니 엄마처럼 맛을 낼 수도 없고, 그만큼 속이 알찬 만두도 없는데 말이다. 엄마는 당신이 할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하셨다. 그중에서 현대자동차 직원들을 위해 캐나다에서 매우 추운 북쪽에 가서 함께 합숙하며 밥을 해주기도 했었다. 아 그러고 또하나 생각나는 건, 내가 다니던 교민신문사 직원들을 위한 식사 담당 요리사였다. 엄마의 음식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일하는 회사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를 사랑했던 아버지, 두분의 사진을 만들어다 드렸는데, 이것도 놓고가셔서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65세 노인연금을 타면서,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25년 이상을 살아내셨다. 엄마는 정부에서 주는 돈을 너무 고마와하셨다. 당신은 캐나다에 기여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 큰 돈을 받아도 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언젠가 그런 말을 당신 친구에게 했더니, "아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자식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모두 세금을 열심히 내니, 권사님은 연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라고 했다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떳떳해졌다고 감사해하셨다.
엄마의 아파트는 우리들의 호텔이었다. 미국 세째형부는 잠이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캐나다에 오면 장모님 침대에서만 잠잘수 있는데 이번에 요양원 들어가시게 되면, 내 호텔이 없어져서 어떻하냐고 하소연하신다.
엄마 집에는 언제나 먹을 게 있었다. 엄마표 게장, 된장국, 콩나물 김치국, 미역국 등이 있었고, 봄이면 민들레 나물, 파래무침, 미나리무침, 조기구이, 정성껏 구워놓은 김 등으로 뚝딱 한상을 차려 내신다. 이 모든 일을 아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할때까지 하셨던 일이다. 아니, 아플때조차도 자식들이 오면 끼니를 차려주려고 애쓰셨다.
당신이 할수 있는 최대한의 일들을 하셨었다. 나는 엄마가 가난한 적이 없었던 것만 같다. 왜냐하면 당신의 씀씀이가 그러셨다. 가까이에 있는 자식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새집으로 이사갈때 엄마가 사주신 "김치냉장고"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이 김치냉장고는 큰언니에게도 사주셨다. 손자 손녀들이 결혼할 때 가장 많은 축의금을 주는 분도 엄마셨다. 그리고 벌써 오래전에 막내와 나와 조앤언니의 라식수술 비용을 엄마가 댔었다. 엄마는 연금을 아끼며 모았고, 가족들에게 선물로 받는 용돈을 모았다가, 꼭 필요한 데 쓰곤 하셨다. 매년 새해가 되면, 엄마를 찾아와 세배하는 자식, 손자손녀들에게 큰 돈을 쥐어준다. 막내동생은 미용실을 꾸미면서 주차할 곳을 마련해야 했는데, 3번째 주차공간을 엄마가 도와줘서 살 수 있었다고 그것 때문에 미용실 운영이 얼마나 수월한지 모른다며 몇번이나 말하곤 했다. 내가 알지못하는 엄마의 선행(?)은 아주 많을 것이다. 엄마께 용돈을 드리면, 이렇게 그 돈이 필요한 자식에게 가곤 했다. 엄마는 교회는 나가지 않으면서, 작년말까지 알뜰히 교회헌금도 한쪽편에 모아 놓으셨었다. 엄마는 이렇게 살뜰히 모든 돈을 다 쓰고 요양원으로 가셨다.
이번에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무일푼으로 마감하게 됐으니, 엄마의 "재정에서의 해방"을 맞게 된 소감이 어떨까 싶다. 엄마가 하나 더 자식들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그간에 엄마에게 받은 그 은혜를 매달 조금씩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탤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마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은 우리 세 자매가 골고루 나눠가졌다. 아직 소파와 침대, 식탁 등 큰 물건들이 주인을 못찾았다. 그중에서 소파는 엄마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잘 사용하셨다. 미국 사위가 캐나다왔을 때 마련해준 그 소파는 아직도 때깔도 곱고, 품질도 좋은 고급 가죽 소파인데, 이것이 누구에게 가게 될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큰언니가 가져가고자 했지만, 언니는 정리해야 하는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나도 이제는 더이상 무엇인가를 들이고싶은 마음은 없으나, 그래도 엄마의 소파는 욕심이 난다. 엄마 생각하면서 잘 쓰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그걸 가져오는 것이 쉽진 않다. 막내동생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며칠전 첫번째 창문방문을 했다. 코로나가 없으면 엄마방에서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데.
편하게 걸칠 스웨터가 없어서 크리스마스 때 입는 빨간색 스웨터를 매일 입고 있다는 엄마 전갈에 따라 부족한 옷들을 찾아서 동생과 함께 갖다주러 갔었다. 엄마가 워커를 끌고 내려왔다. 엄마옆에는 도와주는 이가 곁에 있다. 창문을 마주하며, 어떻게 반가움을 표현해야 할지, 그것도 낯선(엄마를 도와주는 분)이가 옆에 있어서 더욱 어색했다. 그분이 창문 너머로 전화번호를 보여줘서 그걸로 전화하니, 반대쪽에서 받았다. 대부분은 마주보면서 전화로 연결을 하게 되어있나보다. 그런데 엄마와 우리들은 말소리가 들려서 전화통화가 오히려 더 방해가 되었다. 나중에는 모르지만, 아직은 잘 들으시고 이해력도 좋으셔서 바로 전화를 끄고 생목소리로 소통을 시작했다.
"엄마, 이 옷 어때"
"괜찮다"
"엄마 이 신발 어때"
"아니 필요없어. 내 신발 있다."
"아니, 자세히 봐. 엄마신발은 불편하잖아. 이건 뒤를 꾸겨신어도 되고, 아주 가볍고 좋아."
다시한번 보여주니
"신발이 좋아보여요. 편할 거 같아요" 라고 엄마를 도와주는 젊은분이 거든다.
"그럴까?"
그렇게 하나하나 점검하고 엄마방으로 들여보낼 물건들을 선별했다. 내가 집에서 챙겨온 것들은 꽤 많이 통과했다. 막내는 엄마침대에 깔 메트리스 토퍼를 주문해서 가져왔다. 메트리스가 몸에 맞지않아, 그 위에 판자를 올렸는데 그위에 아무리 뭐를 깔아도 딱딱할 거라며, 납작한 토퍼를 주문해서 가져왔다. 엄마는 전화로 그런 것 사지마라고 몇번 말했는데, 막내동생의 억지는 당할 수 없다. 아마도 엄마가 사용해보시면 좋을 것 같긴 하다.
엄마는 예뻐보였다. "귀신같이 무섭게 생긴 할머니에게 예쁘다고 헛소리한다"고 매번 말씀하시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 함함하다고 한다지만 세대를 거슬러, 나도 볼때마다 엄마가 예뻐보인다. 예전보다 더 깨끗하고, 외출하러 나온 것처럼 옷도 차려입으셨다. 방밖에 나가는 것이 외출이라 한다면, 엄마는 살던 집에서보다 더 자주 외출을 하시는 편이다.
엄마방에 일반전화를 설치해서 언제나 통화가 가능하다. 어제 통화에선, 생일잔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노인분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면서, 축하와 흥겨운 시간을 갖게 해줬다면서, 엄마에게도 생일을 물어봐서 알려주었다고 했다. 호적과 진짜 생일이 다르고, 생일도 양력과 음력중 가족들과 어떤 날을 기념했냐고 물어서 대답해줬다면서, 그런 세세한 질문에 감동한 눈치셨다. 지난번 우리에게서 받은 옷은 모두 가져가서 잘 빨아서 이름표를 다 달아서 갖다놓았는데, 마치 새옷처럼 만들어왔다며, 그것도 자랑하신다.
엄마를 닮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엄마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자식들을 캐나다로 데리고 와서 30여년을 살아내셨다. 내가 캐나다에 올때쯤의 엄마 나이가 되어가면서 보니, 남편없이 남은 자식 다 키워내는 것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다.
당신 인생의 즐거움을 저당잡혀 자식들에게 다 내어주셨다. 나이 90이 넘었지만, 아직도 자식들의 애간장이 녹는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고, 전화할 때마다 그 문제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묻는 엄마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