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로움 어떻게 풀었을까
언니 생일에 1박2일
엄마가 요양원에 지난 4월 들어가셨으니 이제 거진 4달이 되어간다. 한 3달쯤 되었을 때 엄마는 한 3년 지낸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엄마의 외로움, 어떻게 풀어드릴까?
그동안 코로나로 첫 방문은 출입구를 앞에 두고 나뉘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동생이 엄마 옷을 가져다 주느라고 몇번 방문했고, 그 방문 후에 엄마의 피드백은 "별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전화가 되기도 하니 엄마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어서 방문에 힘을 쏟지는 않았다.
손자 손녀가 가서 할머니를 방문했던 적도 있는데, 그때는 조금 규제가 풀려서 출입구 앞에서 얼굴을 대면해서 볼 수 있기도 했다. 그 만남에 대해서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왔었다며, 그다지 즐거웠다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보는 것은 안보는 것만 못하다고도 말씀하셨다.
엄마의 방을 방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뒤로 규제가 풀리면서 1시간 동안 방 방문이 가능해졌다), 문앞에서 잠시 얼굴보고 헤어지는 것은 엄마의 "성"에 차지 않는 일인 것 같았다. 그 먼데서 잠시 얼굴보러 내려올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랬는데, 그 뒤로 규제가 더 풀려서 엄마의 외출이 허락된다는 날, 우리는 야무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워터루 동생집으로 나와 언니가 전날 내려갔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엄마의 요양원으로 가서 엄마를 모시고 올라와서 하루종일 지내다가 그날 저녁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그때가 6월이었다.
동생집에서 세 자매가 뭘 했었는지 잊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사촌오빠의 새집을 방문했던 기억은 난다. 3대가 모여사는 그 집에 가서 함께 기타치며 노래부르고, 손자 둘과 새로 태어난 손녀를 보는 호사에다 저녁까지 잘 얻어먹었었다. 사촌오빠지만, 엄마에게는 친아들처럼 우리에게는 친동생, 오빠가 되어주는 맘 푸근한 사촌오빠는 내 글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 동생네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세자매가 함께 내려갔다. 내 차는 너무 높아서 엄마가 승차하기 불편한데, 동생차를 갖고가서 다행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언니집에 들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건강도 믿지못하여 일정을 복잡하게 하면 안될 것 같았지만, 언니가 암수술을 하고, 회복이 더뎌서 고생하고 있을 때여서 언니를 안볼 수가 없었다. 언니는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수술전 항암치료에도 씩씩하게 이겨내던 언니는 위절제 수술을 마친후 너무나 병약해진 상태였다. 수술부위가 회복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언니의 회복에 적신호가 켜져서 마음들이 무거웠다. 그래도 엄마와 언니가 어려운 가운데 상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온 가족이 돌아가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엄마는 모처럼 딸들과 함께 있으셔서 그랬는지, 다시 시들었던 감정이 촉촉히 젖어들면서 살아나기 시작하셨다. 그때 요양원 입소한지 2달쯤 되던 때였는데,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포기할 부분과 포기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마음속에서 싸우는 것 같았다.
자식들에게 전부 다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심각한 환자를 보시면서 드는 미안함부터 참담함까지.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찾지못하는 말없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 등, 도와줄 수 없는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으셨다.
동생네 데크에서 즐거워하시는 엄마
너무 잘해주지만,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기에는 멀고먼 직원들과, 함께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상태. 엄마처럼 정신이 맑은 분들이 겪어야 하는 또다른 고통이 있어보였다. 그리고 요양원이라는 곳이 모두 다른 형편이라서, 동네 마실다니듯 그렇게 다른 방을 손쉽게 방문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는듯 싶다. 그래도 아플 때면 약을 처방해주고, 불편함 없도록 모든 것을 신경써주는 그곳의 삶을 싫어할 수는 없다 말씀하셨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조개넣은 칼국수를 언니가 만들기로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와 엄마는 은행에 가서 엄마의 통장에 내 이름을 올리는 조인트 어카운트를 만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예약하고 와야 된다면서 잘해주려고 하지 않더니, "거래 은행에 갔더니, 예약하지 않아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해줬다. 우리 엄마가 요양원에 계셔서 나오시기 어렵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직원중에 한인이 하나 있다면서 우리를 담당하게 해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7월에는 언니집으로 모시고 와서 함께 칼국수를 끓여먹는 외출을 한번 더했다. 그리고 지난주 엄마의 1박2일 여행이 계획되었다. 언니의 생일을 맞아 사촌오빠네서 생일축하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엄마를 하루전에 모시고 나와서 함께 온밤을 지낼 생각을 하니, 정말 설레서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마침 온타리오가 규제가 약간 풀리는 와중이어서, 실내 25명 모일 수 있고, 실외 100명 가능했다. 이게 언제 바뀔 지 모르니, 오랫만에 가족모임을 하고싶다는 내 마음속 열망을 가족들 동의를 얻어 여러가지 방안을 물색했다.
처음에는 우리집을 생각했다. 혹시나 미국 동생이나 언니가 올 수 있을까 꿈을 원대하게 품고서. 그러다가 미국 가족들이 올수 있는 가망은 없어지기 시작했고, 우리집은 토론토로부터 3시간이 걸리니, 주인공 큰언니와 엄마가 오실 수 없는 지역이라고 판정을 받았다.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곳은 막내동생네인데, 최근 문을 연 미장원 손님이 넘쳐서 매일 오버타임을 하면서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래도 동생이 먼저 나섰으면, 어떻게 그집에서 할 수도 있었으련만, 사촌오빠가 재빠르게 자기집에서 하자고 한단 말이다. "어이구 어떻게 그래~~~" 하면서 "그래도 될까? ~~~" 그렇게 길게 끌다가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온 가족 구성원 전부 "어떻게 사촌동생에게 생일을 부탁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통에 중간에서 그 대답을 여러번 해야했다.
내 개인적으로 각색해서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답한 말은, "오빠네가 할 수도 있지.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그집에 못갚으면, 다른 사람에게 갚으면 돼. 오빠가 이사도 했으니 그런다고 한 것 같어. 그리고 오빠네 음식이 맛있잖아", 그렇게 설렁설렁 넘겼다.
그날 오빠네 집에 피었던 아름다운 웃음꽃은 이곳에 다 옮겨적을 수 없겠다. 아 그리고 그집에 손녀딸이 태어난지 100일 되는 날이었던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었다. 손녀백일과 사촌누나의 생일을 잘 차려준 오빠와 올케, 그리고 며느리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조카 며느리가 직접 만든 특별한 생일 축하 꽃다발
오랜만에 20여명의 가족이 모여서, 고기를 실컷 먹었다. 케잌과 촛불끄기 후 축하송으로 언니를 기쁘게 해주었는데.. 축하송이 탄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엄마와 오손도손 이야기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낼 나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었다. 언니의 생일 축하 노래를 사촌오빠와 3자매가 준비하기로 했는데, 제작(?)을 책임졌던 막내가 어떻게나 호되게, 연습을 시키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가 그렇게 어려운 노래인줄 처음 알았다. 8분 음표, 16분 음표에서 내가 박자를 잡지 못한다고, 골백번 다시 불러보라고 하는 바람에 나중에 삐질뻔했었다.^^ 연습량치고는 언니에게서 눈물을 빼내지도 못했고, 그다지 크게 감동한 사람도 없어보이는 그렇고 그런 공연이 되었다. 화음을 넣었던 막내는 자신이 헤맸다고 고백했으니, 그애 탓이라고 해두자. 막내는 앞으로는 그런 방식으로 제작(?)에 임하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으니, 싱어의 자리를 사퇴할까 했는데, 좀 두고봐야겠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나는 언니에게 주려고 위에 좋다는 "양배추즙"과 성경필사를 할 수 있는 노트를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이것이 언니의 화를 돋구었다. "양배추즙"은 맛이 없어서 전에 내가 사준 것도 먹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성경필사는 하고싶지 않다고 손을 훼훼 내저었다. 그래서 오빠를 위해 준비했던 홍삼은 어떠냐고 했더니, 그건 좋다고 해서 두집이 서로 바꾸고, 필사노트는 내가 다시 가져왔다.
원래 단순하고 칼칼한 언니 성격을 아는지라, 함께 웃고 끝냈는데, 조카는 이모가 여러 사람앞에서 면박 당한 것 때문에 미안하다면서 전화가 왔다. 나는 "네 엄마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솔직한 네 엄마이기에 괜찮다. 나를 배척한 것이 아니고 물건을 배척한 것을 내가 아니, 신경쓰지 말라"고 말해줬다.
그러게, 돌아가신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열가지가 다 좋을순 없는 법이라고." 주인공 언니의 기분을 쓸데없는 일로 망쳐놓다니, 앞으론 요즘 애들처럼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사야겠다"고 다짐하는 중이다.
막내동생은 엄마와 하룻밤 같은 침대에서 잤는데, 숨소리가 고르지 않고, 자꾸 기침을 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모처럼 잘잤다고 말씀하셔서 놀랐단다. 그애는 엄마와 새벽같이 일어나서 자신의 미장원으로 가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엄마 파마해준 것이 특별히 좋았다고 말한다. 엄마는 막내가 빈 공간이었던 곳을 사서 일일이 손을 보고, 디자인해서 인테리어까지 마감한 막내의 미장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을 것이다. 엄마의 모습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어서 요양원으로 돌아갔으니,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엄마의 어깨는 한동안 올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