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 김치를 엄마와 함께
엄마 언제 한판 해야지?
엄마와 전화통화가 되면 내가 양념처럼 하는 말이다. 엄마와 해야 할 한판을, 엄마도 알고 나도 안다. 작년에 그 한판을 하려다가 하지 못했기에, 우리들의 바램이 풀어질 날을 기다려왔다.
작년 12월초 엄마를 모셔오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조금이라도 건강할때 엄마와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생각으로 골똘했다. 가끔씩 외박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완벽한 방문은 되어주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그날을 계획할라치면, 내게 사정이 있어서 주저했고, 엄마가 외박하실 정도로 건강이 받쳐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엄마의 방문을 계획해놓은 그때쯤 오미크론으로 요양원이 가장 먼저 통제대상이 됐다. 방문할 수도 없고, 외박을 나올 수도 없는 그런 상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외박도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엄마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엄마가 있는 곳이 그래도 제일 안전해" 하면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말이 지나가고, 요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엄마가 있는 6층에 오미크론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양원 환자들은 모두 방에 격리되어 있다고. 비상이었다. 그리고 며칠후 더 무서웠던 소식은 엄마도 오미크론에 감염되었는데, 너무 놀랄 일은 아니라고 했다. 6층에 병원에 다녀온 어르신이 확진됨으로 해서 모두 검사했는데, 거의 10명 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나왔다고. 어르신들은 모두 3번, 4번씩 백신을 맞았기에 증세가 모두 미미하다고 하였다.
코로나를 얼마나 무서워하시는데, 엄마가 확진된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원장 선생님은 약간의 미열이 한번 있었을뿐 증세가 없으니, 굳이 알게 하지 않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주셨다. 가족들도 의논을 통해 엄마의 확진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런 일 때문에 더군다나 방문은 아예 허용되지 않았다. 엄마는 전화하면 방밖을 못나가는 생활이라 힘들지만, 아버지를 비롯하여 옛 어른들이 내곁에 함께 있는 기분이라며, 괜찮다고 하셨다. 이제는 헛것을 보시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너무 심심한 고로 옛 사람들을 엄마가 있는 장소에 초대해서 함께 있는듯 싶었다. 전화로는 아직 정신을 놓거나 그러신건 아니지만, 조금씩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혼동하실 때도 있었다.
그런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오미크론이 정점을 찍고, 엄마가 계시는 6층에서도 모두 격리 기간을 무사히 잘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문과 외출, 외박이 환자의 건강 정도에 따라서 허락이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더이상 미루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직도 눈이 오고, 길이 좋지않았지만, 하루하루 미루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이라 엄마의 외박을 추진했다. 7일간이냐, 10일간이냐 엄마에게 물었더니 일주일이면 족하다 하셨다.
그래서 엄마를 모시고 나온 것이 지지난 주였다.
엄마와 그야말로 한판 플러스 한판을 해서 두판을 했다.
엄마가 요양원에 있으면서 자식들에게 충분히 무언갈 더 만들어주고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만 생각난다 하였다. 김치도 더 담아주고, 떡도 더 만들어주고, 만두도, 된장도, 게장도... 엄마의 온몸이 쇠약해가는 와중에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 더 먹여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만 하시는 것 같다. 요양원에서 시간은 한없이 많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런 생각속에 사신다. 힘도 없으시고, 가끔은 숨도 차고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데도 평생을 해온 그 일을 기회가 된다면 또한번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작년에 서산에 있는 언니에게서 온 고춧가루로 얼마나 김치를 담고 싶으셨을까? 엄마가 나오면, 말씀만 하시고 내가 하면 되니, 그런 일을 하자는 것이 "한판"의 의미이다.
그 한판을 위해 엄마와 시장을 봤다. 엄마는 다시 마트에 올수 있게 된 것이 꿈인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엄마, 힘드시면 차에서 기다리면 내가 빨리 사올께, 했는데 엄마가 같이 시장을 보시고 싶다고 해서 함께 했던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시장에서 엄마가 어떻게 저런 사과가 있다니, 하면서 관심보인 허니 크리스피 사과를 한봉지 샀다. 정말 잘생긴 엄청나게 큰 과육이었다. 나중에 나는 집에서 우리가 먹던 갈라 사과와 엄마의 사과를 비교하며 엄마의 그릇과, 딸내미의 그릇의 차이라면서 셀프 디스했지만, 사실이다. 난 언제나 싼 취향, 엄마는 물건 하나 사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사야 직성이 풀린다. 아직도 엄마와 나의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날 새우젓이 보였는데, 정말 비쌌다. 펜데믹 이후라서 그런지 원래 그랬는지. 싼것을 찾아 휘번덕이는 나를 향해, 새우젓은 젖이 안나올때 어린애에게 먹이면 살이 통통오르는 귀하고 좋은 것이라며, 강매해서 눈물을 머금고 거금 42달러를 주고 2kg짜리 새우젓을 샀다.
엄마와 아픈 큰언니도 보고, 그길로 3시간 걸려 운전해서 엄마를 모시고 왔다. 잠시 그런 생각까지 했다. 엄마가 이런 정도의 정신과 건강이라면, 혹시 여행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어쨋든 도착한 날부터 일을 하시고 싶어하셨지만, 엄마를 다독여 하룻밤 주무시게 했다. 예전에 엄마가 쓰시던 친손자 며느리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 이불과 요를 침대에 펴놨는데, 그날밤 아주 달콤한 잠을 주무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우리집에 바이어가 건축업자와 들리기로 되어있어서 아침부터 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이 방문하는 동안 엄마와 나는 선룸에서 예쁜 티잔과 주전자를 꺼내놓고 티타임을 가졌다. 햇빛이 잔잔이 들어오는 그 방에서 엄마와 티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 감사했다.
그날 엄마와 함께 했던 것은 물김치 담그기였다. 애기배추와 열무를 엄마가 고르셨고, 나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국물김치였는데, 생각보다 국물이 적다며, 풀을 조금 더 쑤어서 붓자고 말씀하셨다. 된장찌개를 끓일때였던가, 멸치를 건져내지 않는 내게 손님상에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나는 멸치뼈와 속을 정리해 버리고, 엔간한 멸치는 건져내지 않고 먹기로 한다고 말씀드린다. "..를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작은 것들은 과연 꼭 그래야 할까, 하면서 저항을 해보는 것중에 "멸치"도 포함된다고 내 의견을 말한다.
그렇게 김치 한판을 끝내고 또 다른 한판은 "김 기름발라서 굽기"였다. 요양원에서의 식사가 처음엔 마음에 든다고 하셨는데, 갈수록 같은 것을 돌려먹어서 그런가, 엄마에게 꼭 필요한 것이 "김" 반찬이 된지 조금 되었다.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김을 사다드리고는 했는데, 매끼 김을 드셔서 그런지, 동이 날까봐, 염려하신다. 언제 외박나오면 김을 구워야 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식품점에서 1회씩 포장된 김을 여러 제품 골라샀다. 엄마는 김마다 갯수가 다르다며 꼼꼼히 살피며 샀는데 밖에서 봐서 몇장씩 들어있는지 알수 있는가 말이다. 그것만으로 양에 안차 100매든 파래김도 샀다. 그정도면 충분할까 했는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 다 꺼내오라고 하셨다. 몇년씩 묵었던 김들이 모였다.
그래서 김공장이 차려졌다. 언니는 기름을 바르고, 엄마는 소금을 뿌리고, 나는 김을 굽고. 나중에 자르고 포장하는 일까지. 엄마는 중간에 낮잠도 주무셨고, 나는 중간중간 식사 준비와 가게도 잠시씩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식사 전까지 그 일을 마쳤다. 얼핏 계산해보기로 거진 400장쯤 되기 않았을까 싶다. 언니는 엄마에게 그동안 못한 효도를 하는셈치고 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 일을 했다. 기름바르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싶다.
다른 가족들에게 김공장 소식을 전하며 엄마가 얼마나 기뻐하시든지. 먹을 수 있을까, 했던 김들이 기름바르고 소금을 쳐서 불기를 입으며, 모두 건강한 먹거리로 탄생했다. 딸들이 먹을 김을 한통씩 담고, 엄마는 1회씩 소분해서 냅킨에 모두 쌌다.
더이상 즐거울 수 없는 엄마의 공장이었다. 엄마는 이틀째, 삼일째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의 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이제는 적응이 되셨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게 남아있고, 요양원에서 고쳐줬으면 하는 것도 있고 의견이 성성하시다.
그런 의견을 환자들 회의시간에 잘 말해보라 하여도, 그랬다 하기도 하시고, 그렇게 해봤자, 잘되지 않는다 하기도 하시고. 살아있음으로 그런 긴장과 갈등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견을 관철시킬 생각을 하지말고, 그냥 몇번을 말하다 보면 고쳐질 수 있다고 조언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잘지내다, 동생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막내딸집도 가보고 싶으시기도 하시고, 그곳에서 요양원으로 들어가면 조금 거리가 가까와지니, 엄마에게도 더 낫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나와 언니가 모시고 가서 하룻밤 동생네 자고 우리는 다음날 올라왔다.
엄마는 첫날 동생네에서 잠을 설쳤다. 우리집에서 하고싶을 것을 해서, 기쁘게 지냈지만, 약한 몸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했다는 점도 있었고,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다. 하루종일 누워계셨던 다음날, 엄마가 기운이 없어서 넘어지셨는데, 마침 재활용 쓰레기통앞에서 넘어지셔서, 얼굴만 다쳤다는 동생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았다.
올것이 왔나, 싶었다고 했다. 그래도 쓰레기통이 의지가 되어서 몸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도 하지 못하고 동생이 간호하다가 요양원에 모셔다 드렸다.
엄마는 꿈꾸던 "외박"을 하고 나서 지금은 많이 편찮으시다. 엄마가 좋아하신다고, 엄마가 하고싶은 걸 다하게 놔두었던 일이 반성도 되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기미를 많이 느끼지 못했었다. 언니와 내가 함께 있어서 엄마가 힘들어하면 누워계시게 하고, 엄마의 말을 막지않고 잘 들어주어서 엄마의 기분이 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하던 일을 하면, 없던 힘도 솟아나는 그런 이해너머의 상황이었다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연약한 할머니로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와 하기로 했던 "한판"이 이렇게 엄마를 궁지에 몰아넣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엄마와 김치를 담그면서 김을 바르면서 웃었던 웃음은 정말 특별했다. 마지막날 아침, 엄마에게 기도를 구했다. 이틀후에 "컨디션 해제"가 되는 날인데, 엄마가 기도해주시면 하나님이 잘들어주실 것 같다고. 엄마의 명기도를 여기에 옮길 수가 없어서 유감이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보고있다. 동생네에서 아픈 몸을 추수리고 있는 엄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다. 다 죽어가던 엄마가, "집이 잘 팔렸다. 엄마가 기도해줘서" 했더니, 엄마 특유의 고성의 환호성을 내지르셨다.
엄마를 만남에 있어서 기도를 드렸다. 엄마와 좋은 시간을 갖게 해주시기를. 그러므로 지금 편찮으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엄마와 나와의 만남을 위해 엄마에게 특별한 힘을 주셨던 것같다. 둔감한 딸이 엄마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니, 하나님이 엄마에게 힘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엄마의 넘어짐과 힘없음을 목전에서 당한 막내 동생에게 미안함이 든다. 이렇게 엄마와의 "한판 플러서 한판"의 시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