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떠나셨어요
아름다움보다 더한 표현을 나는 찾지 못했다.
"아름다운" 엄마가 떠나가셨다.
목사님께서는 49명의 자손들을 남기시고 떠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엄마는 증손주까지 49명과 함께 울고 웃으며 이 세상을 사셨다.
그것뿐인가?
엄마의 죽음으로 우리가 보게 된 엄마의 친구들, 믿음의 형제자매들, 엄마 자손들의 친구들까지. 엄마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이 땅의 소명의 완수하고 떠나신 것이 분명하다.
고인 약력
한월수 권사님은 1928년 4월에 태어났습니다. 19세 때 이기덕 씨와 결혼했습니다. 교사의 아내로 1남 10녀의 엄마로 고단하지만 활기찬 삶을 이어왔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989년 5자녀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 왔습니다. 그때부터 염광교회에 출석하셨고 1992년 권사 취임하셨으며 교회는 권사님의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2021년 4월 무궁화 요양원에 입소하셨으며 2022년 3월 20일 향년 9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엄마의 장례예배 순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고인의 약력을 알려달라는 교회 측의 요청에 이렇게 적은 것은 나였다. 엄마의 삶이 이렇게 간단하게 적혀있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넓음과 엄마의 소녀 같은 감성과 엄마의 카리스마까지.
우리 집과 동생집에 마지막 방문을 마치고 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 선반 위에 있는 것을 내리려고 하다가 넘어져서 손목을 다쳤었다. 그것이 골절이었다는 것을 몇 시간 후에 요양원 측에서 깨닫고 응급실에 가서 기브스를 하고 오셨다. 응급실에 갔을 때 엄마 곁에 우리 중 하나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어가 안 되는 엄마가 얼마나 놀라고, 힘드셨을지. 미국에서 방문 왔던 동생이 병원에 들어가려고 하자, 코로나 때문인지 방문이 허락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었다. 요양원에 가려고 내려가 있던 나와 언니, 그리고 동생은 엄마를 기다리며 하룻밤 토론토에서 머물렀고, 그다음 날 아침에 엄마를 방문했다. 그날 인사불성인 엄마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한번 방문에 1시간밖에 허락이 되지 않았는데, 그날은 엄마의 상태가 심각해서인지 우리들은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다. 나중에 엄마는 미역국의 국물을 조금씩 받아마셨고, 녹두죽까지 조금씩 넘기셨다. 그리고는 조금 말씀까지 하셨지만, 고통에 울기까지 하셨다. 그날 엄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 줄기를 찾기가 힘들었다.
동생이 이틀 뒤 방문했을 때 더 험악한 엄마 모습을 보게 됐다. 거의 깨어나지 못하는 엄마 곁에서 동생은 눈물바람을 하였다. 요양원 측에서는 넘어진 충격으로 며칠 동안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면서 가족을 위로했다. 동생이 보고 온 후로 그다음 날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고, 가족이 방문하고 간 사실도 모두 안다고 소식을 주어서 우리는 마음을 졸이며 엄마의 회복을 바랐다. 그랬는데, 바로 그다음 날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셨고, 엄마는 응급실로 가게 된다.
그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딸네 부부가 우리 집을 방문한 다음날이다. 병원으로 가게 될지도 몰라서 저녁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조금 거리가 가까운 막내 동생이 먼저 내려가서 연락을 주기로 하였다. 의사의 소견에 따라서 우리가 내려가야 할지 알려준다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남편도 일을 마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엄마 상태가 안 좋아져서 모두 와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랴부랴 오웬 사운드에 있는 언니에게 내려오라고 하고, 토론토에 갈 준비를 하게 됐다. 막내동생은 시시각각 엄마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 같다며, 빨리 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대기 시작했다. 날아갈 수도 없고, 언니를 기다려서 떠난 길이 거의 밤 9시가 넘어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토론토에 사는 가족들이 엄마를 보러 갔다. 코로나로 응급실은 4명 이상은 한 번에 안된다고 해서, 가족들마다 한 팀이 들어가고 나면 한 팀이 들어가고, 하면서 모두 엄마를 보고 갔다. 조카 조엘이는 할머니를 보려고 눈물을 흘리며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는 소식도 들렸다.
엄마는 편안해 보이셨다. 아무래도 페인 킬러 때문이었겠지만, 고통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엄마의 의견대로 가족들이 의논해서 어떤 물리적인 처치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엄마의 심박수가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혈압이 상당히 낮고, 숨쉬기가 힘들고 그런 상황이었다. 엄마는 콧줄 산소호흡기는 부착하고 있었는데, 음식물 반입을 위한 것 등을 처치하지 않기로 하였다.
동생은 엄마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눈물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편지이기도 하고, 속삭임이기도 하고.
"엄마 내가 엄마를 기다리게 하지 않을께. 이제는 내가 기다릴께. 매일 엄마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깟 일이 뭐라고 엄마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않아서 미안해. 엄마 고마워. 나도 엄마처럼 살 거야. "
이런 내용들을 흐느낌을 담아서 절절이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모두 잠을 좀 자라며 보내고, 우리는 밤새 병원 응급실에 있었다. 응급실치고는 꽤 넓어서 세 사람이 있을만했다. 처음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언니가 타고 온 휠체어 하나와 또 하나의 의자를 가져와 세명이 의자에 앉아서 조금씩 졸면서 그렇게 밤새 엄마를 지켰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들, "나의 살던 고향은"과 생각나는 대로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누군가가 눈치를 줬다면 그쳤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눈치를 주거나 뭐라 하지 않았다. 엄마의 상태는 거의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의사의 판단이었다. 그래선지 4시간마다 진통제를 줄 때 빼고는 누구도 커튼 안으로 방문하지 않았다. 아침나절이 되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야겠다. 캐나다에 있는 가족들은 엄마가 얼굴을 봤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얼굴을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 명씩 화상통화를 시도했다. 엄마가 말씀은 못하시지만, 듣기는 하시는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한 명씩 다 전화를 돌렸다. 가족들의 인사가 끝나고 우리들도 모두 엄마와 긴 대화를 나눴다. 엄마가 편안히 가시도록, 그간 엄마가 베푼 사랑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을 드렸다. 나는 그 와중에 마음이 무거웠다. 요즘 연락이 없는 막내딸에게 할머니의 위독한 사실을 알리고,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수로 들어가면, 꿈쩍하지 않는 그 애가 만약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연락 않는다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런 기도를 드렸다. 전화기까지 고장 났다고 하니, 어떻게 연락한단 말인가? 나는 이메일로 편지를 보내 놨다. 그날 아침, 막내와 연락이 되었다고 데리려 가겠다는 남편의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언제까지 살아계실지, 알 수 없었다. 막내의 남자 친구의 전화로 연락을 했다. 바로 막내가 받았다. 할머니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더니, 막내가 울면서 할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 그랬다. 막내의 전화 이후 엄마는 한 4초쯤 후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봐야 할 사람을 모두 다 보고 돌아가셨다고 우리는 보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하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돌아가시고 난 후 토론토 가족들에게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연락했다. 코로나라며 4명 제한이던 그 방에 제한 없이 방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 집 막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마지막 기도까지 함께 했다. 돌아가셨지만, 임종의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런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는 느꼈다. 숨이 끊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의사가 와서 편안하게 가셨다고 말해주었다. 드라마처럼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을 지켜서고 있다가 "사망시간"을 통보해 주진 않았다. 확인이 다 된 후 거의 20여분이 지나서 "죽음을 받아들이는가?"라고 우리들에게 물은 후, 그 후로도 조금 지나서 사망시간을 알려줬다. 그래서 그런지, 삶과 죽음이 그렇게 칼처럼 나뉘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가족들은 다 보내고, 밤샘했던 우리들은 엄마와 4시간을 더 함께 한 후에 병원에 엄마를 맡기고 돌아왔다. 이제는 장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