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떠나셨어요 2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교통체증을 뚫고 병원에 오셨다. 동생 혼자 있을때 오셔서 임종예배를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었던 것만 같다. 동생이 순간순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나중에 그 영상을 보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후 방문하려고 요양원에 신청해놓으셨었는데, 그 시간이 당겨진 것이다. 나중에 녹음된 동영상을 다시 들어보니, 사모님이 엄마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셨다. "권사님, 보시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은 자손들과 모두 만나시고 하늘나라로 먼저 가세요. 그곳에서 만나요"라고. 동생은 사모님의 기도대로 엄마가 모든 자손들을 다 만나고 가셨다면서 눈물지었다.
엄마가 돌아가신후 장례준비를 해야했다. 나와 조앤언니와 막내동생은 그날부터 함께 움직이며 일처리를 했다. 나도 언니도 장례준비까지 하게 될지는 몰랐다. 남편은 하루 문을 닫고 내려왔다가 장례식날 다시 가게문을 닫고 내려오기로 했다. 막내가 엄마 대신 아빠를 도와 일을 봐준다고 하여, 나도 집에 가지않고 준비할 수 있었다. 막내동생의 큰딸은 엄마를 염려하여, 엄마옆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엄마를 병원에 두고 우리 모두 동생집으로 돌아왔다. 지치고 힘든 우리를 위해 조카들이 밥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집안의 가장 꼬마들이었는데, 어느새 이모와 엄마의 밥을 해놓을 정도로 자라있어서 놀라울뿐이었다. 우리들의 식사와 엄마의 실의를 살피느라, 조카들은 차를 때때로 끓여다주고, 조용조용이 말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실 손가락 하나 까닭할 힘이 나지 않았다. 특별히 먹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엄마는 20년전에 장지를 사놓으셨고, 비석까지 이미 만들어놓았다. 우리집에 있던 엄마가 준비해놓은 수의와 사진등은 "혹시나" 하면서 엄마 보러갈 때 내가 가져갔었다. 그걸 진짜 쓰게 될지는 몰랐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부를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를 10여장 복사해서 큰상자안에 넣어놓으셨었다. 엄마가 입고가실 분홍색 한복과 속옷까지. 그때가 오면 모두 당황할테니, 이것만 잘 가지고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교회에 일이 생겼을때 도움을 주는 장례준비사가 있다며 교회의 추천을 받아 그분께 연락하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처리가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그 다음날부터 캐나다에 방역이 풀려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제한이 없었다. 그분의 도움중에 아주 큰것이 있었는데, 장례시간을 금요일로 정한 것이었다. 미국 가족들중 자매들은 엄마를 보러오려고 준비하는 중에 엄마의 부고를 듣게 됐는데, 그날 오게 되면 일주일 이상 장례식까지 기다려야 해서, 조금 일찍 하면 어떨까 장례준비사에게 당겨서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목사님의 시간도 봐야하고, 장례식장에 좋은 자리 나는 문제도 있고, 특별히 장지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되어야 해서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택한 날이라고 정중하게 제안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급하게 올 것 없고, 금요일에 장례일정이 잡혔으니, 며칠후 떠나면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떠나기전 "코로나 테스트"를 받아야 하지만, 빠르게 결과가 나오는 검사가 허용되어 그것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장의사를 만나서 의논해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큰형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큰형부는 엄마 장례를 위해 보험을 들어놨으니, 이번 모든 경비는 그것에서 쓰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도 마음이 쓰였을 아픈 큰언니, 그리고 아직도 관계에서 삐걱대는 큰언니와 형부지만,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말씀만으로 감사하다,고 사양했으나 형부의 의지는 확고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장례준비였기에, 비용에 대한 부담이 많이 없었다. 장의사를 만나서 상담을 하니,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우선 장지를 사놓아서 일이 훨씬 쉬워졌다 . 같은 장지를 현시세대로 사려면 거의 13,000불 정도인데, 엄마는 1,400불에 사놓으셨으니, 10분의 1가격이었던 것은 놀라움이었다. 엄마의 마지막 집이 될 관을 함께 봤다. 점잖고 고운 나무색으로 세명이 동의하여 골랐다. 가격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 관을 또 쌀 "석곽"이 있다고 소개받았다. 비가 오거나 하면 관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해준다 하였다. 그것까지 하기로 했다.
돌아가시기전 엄마와 나눈 대화들(일방적이지만), 장례진행 상황들을 가족 카톡방에서 공유했는데, 미국 가족들이 오는 것은 그렇지만, 한국에서 언니가 울고만 있으니 자식들이 가보라고 한다며, 표를 구매중이라는 소식이 왔다. 코로나 시대에 외국에 나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밖에 나와본 사람만이 안다. 언니는 혼자힘으로는 할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자식들이 나서서 도와줘서 장례 이틀전, 수요일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은 미국에서 자매들이 오기로 하였고, 사위와 조카들은 그 다음날 오기로 했다.
엄마를 생각하며 장례예배 순서를 가다듬고 가다듬었다. 막내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있어서, 생각 자체가 힘들어보이다가도, 한점 오차라도 있을까, 혼신의 힘을 다했다. 너무 바쁜 와중에 엄마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일찍 알아채고 수발을 들었던 막내는, 그야말로 옆에서 보기에 너무 안스러울 정도로 앉기만 하면 울었다. 막내와 엄마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형부의 도움을 바탕으로 하니, 장례를 진행하기가 훨씬 부드러웠다. 우선 조문객들로부터 "조의금"을 받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곳 문화는 누군가 돌아가셨을때 그 사람을 추모하면서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문화이다. 아직도 그 문화는 우리것이 아닌것인양, 어색하여 한국사람들은 장례식장에 조의금을 들고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엄마의 조문객들은 주로 교회에서 오실분들이니, 교회 통신망을 이용하여 그런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위와 손자들이 관을 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막내와, 미국에서 오는 동생, 그리고 한국에서 오는 언니 이렇게 세명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손자손녀들이 할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를 준비했고, 좋은 사진을 모아 영상으로 틀어주는 것은 조카가 맡아서 수고해주기로 했다.
엄마가 준비한 영정사진은 크기도 좋고, 잘 나왔지만 20여년전에 찍은 것으로 "엄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 사진을 다시 뽑기로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어머니날, 함께 벚꽃구경을 가서 찍은 사진, 엄마가 꽃다발과 금일봉을 받고 환하게 웃으시는 사진을 골랐다. 그 사진 원본이 없어서 카톡 사진을 확대하려고 하니, 인터넷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끓이고 있는 참에, 동생이 교회분이 사진일을 하시는데, 그분께 물어봐야겠다고 했다. 겨우 장례 하루전날 그분이 마감시간이 지났는데도 문을 열고, 사진확대를 해서 뽑아주었다. 엄마 영정사진과 함께 우리들이 골라온 사진 몇개를 확대했는데 화질이 좋지 않았는데도 잘 나왔다. 마지막 사진 작업까지 모두 마쳤다.
장례가 오랜만이라서 몇명이 올지, 그 모든 것이 안개속이었다. 예배전, 분홍한복을 입은 엄마를 모두가 보고 인사를 하였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에는 아주 예쁜 모습이었는데, 관속에 누워계신 엄마는 그날 입안에 무엇인가를 많이 넣은듯, 모습이 조금 변해있었다.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뵐 수 있을지 않았던 미국 세째언니는 장례식장에서 흐느낌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미국에서 온 가족이 모두 9명이 되었고, 캐나다 가족이 20명이 훌쩍 넘었다. 캐나다에서 엄마의 아들 노릇을 했던 키치너의 사촌오빠네 가족까지, 가족만 해도 30여명이 넘는 숫자였다.
장례식에는 많은 분들이 오셨다. 장례순서중에 막내동생이 엄마와 함께 촬영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노래 영상이 있었는데, 엄마의 생전 목소리와 귀여운 엄마모습을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를 사랑하던 한분과 나중에 식당에서 조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엄마의 절친 권사님의 따님이었는데, 당신의 엄마께서 13년전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며 두분이 천국에서 만나지 않으셨겠냐고 말해줘서 깜짝 놀랐다.
그랬다. 엄마가 꿈꾸던 그런 장례식이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교회 가족들을 한꺼번에 만나고, 엄마가 존경하던 현 목사님의 집례로 예배가 마쳐졌고, 원로 목사님의 환송을 받으며 하관예배가 진행됐다. 엄마의 그런 희망을 "세속적인 바램"이라 은근 흉을 봤던 적도 있었다. 장례예배 때문에 교회를 다니나? 하면서 말이다.
엄마는 요양원에 계시면서 자식들을 보지못하고, 그렇게 돌아가시던 옆방 할머니의 죽음을 보시곤 많이 애통해하셨었다. 귀한 엄마였을텐데, 저렇게 죽어가서 어떻하냐시면서. 엄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지 싶다.
장례전 마지막 날에는 동생집에서 모두 잘 수 있는가를 의논하다가, 에어비앤비를 얻을뻔 하였다. 그런데 멋지게 생긴 그집이 윗층을 통째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하실만 에어비앤비로 꾸민집이 아니던가? 그래서 혼비백산 예약을 취소하기도 했다. 누구의 집보다 훌륭한 동생집에서 온가족이 모여 식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엄마에 대한 회상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엄마의 돌아가심을 전후하여 가족들은 많은 기쁜 소식들이 있었다. 우리가게가 팔린 것을 엄마는 알고 가셨고, 미국 동생은 큰교회 상담사로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고, 동생네 둘째딸은 본인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좋은" Sheridan College 디지털 만화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그날 다른 동생 딸의 생일파티까지 있었다.
우리들의 삶은 이렇게 저렇게 계속되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엄마를 따라 이세상을 떠나게 될것이다. 엄마가 준 정신적 유산을 힘입어 내가 힘들 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해서 할때마다, 사랑이었던 엄마처럼 정성을 다하게 해주세요,가 나의 기도가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