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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n 21. 2022

마지막 퇴근

정리는 언제나 힘들다

4월 13일의 일기

그 소낙비는 누구의 눈물이었을까
기상청에서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간 비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돌아보게 하고
어느곳 비샐틈이 없나 염려하기도 한다.

그것은 엄마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다.
엄마는 크고 환한 미소를 지니고 
우리를 보신다.

크고 환한 미소를 위해
공기를 정화시키기 위한 소낙비였다고.
해가 뜬후 알아차리게 될것이다.

-어젯밤 내집을 창문 넘어 침입했다-


집의 구매가 결정되고 나서 나머지 일은 이사갈 작업이었다. 이사해야 하지만, 짐을 쌀 수 없었던 때와 비교해보면 너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24년간 구석구석 쌓아놓은 짐들이, 그 더미에 파묻혀 죽을만큼 많았다. 중간중간 버린다고 버렸지만, 하나를 치우고 나면 또다른 하나가, 튀어나오고. 내짐으로 여겨지는 걸 쌀때까지는 쉬웠다. 남편의 것이라든가, 아이들이 남겨놓은 것이라든가, 내가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문제였다. 나는 다 버리고 가고 싶었다. 그야말로 책까지도 모두 버릴 수 있었다. 그간 모여진 사진들도 물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다르게 반응하면 재빨리 꼬리를 내린다. 사실 결정하는 것을 미루게 해줘서 고맙다. 결정은 그만큼 에너지가 들어간다.


남편도 많이 양보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때로는 그의 말이 맞는다. 다 버렸다가는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창고에 쌓여있던 것들은 꽤 많이 버렸고, 소파등 안쓰는 것은 가게앞에 내놓았더니 곧 없어지기도 했다. 남편이 열심히 챙기는 조명도 몇개는 버렸는데 또 많이 가져왔다. 이곳에 와서 다시 창고에 들어간 것도 많다. 


이사해본 사람의 이구동성,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살림집과 함께 한의원 정리와 가게 오피스만 정리했기에 망정이지, 가게 물건까지 정리해야 했다면 그건 거의 초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사가기 마지막 날까지 매일이 전쟁처럼 물건을 버리고, 짐을 싸는 날들이 이어졌다. 남편은 트레일러에 짐을 싣고 물건을 버리러 landfill 을 가야 하는데, 이 동네 랜드필드는 매일 열지 않아서 시간맞추기가 어려웠다. 이번뿐 아니라 이사할 때마다 짐버리러 가는 날은 비가오고, 시간에 쫓기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큰애가 와서 아빠를 도와 landfill을 두어번 갔다왔다. 짐을 버리면서 돈을 내야 한다. 짐이 결국 돈이다. 이사갈 동네는 소도시인지라, 랜드필드가 매일 문을 여는 것을 발견해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언제든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한의원에 있던 한약장도 가게밖에 내놨다. 내놓으면서 이걸 사러 토론토까지 운전해서 내려가고, 그걸 싣고 오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잠시 난다. 모든게 때가 있는 거랬지. 동네 할아버지가 연장통으로 쓴다고 바로 가져갔다. 그 한약장은 할아버지의 차고에서 얼마간 살아있으려나. 


버리고 오자고 내가 주장했던 것중에 "오래된 LP판 플레이어가 있다. 전축이라고 말할 수 있나.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남편은 엔틱이라며 간직하고 싶어했지만, 전축으로 쓸수도 없는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답답했다. 그 물건도 결국엔 새집에 왔고, 한의원의 장식장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려고 버둥거리다가, 결국 버리게 됐다.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비실거리는 나도 힘을 써야 해서, 쓰레기처리장으로 옮겨갔다. 장사하면서 모아진 미국동전도 큰 짐이 됐다. 한곳에 짱박혀있을 때는 몰랐는데,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돈만 아니라면 확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돈을 버리는 것이 불법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지만, 1센트짜리가 몇묶음씩 있어서 그건 버리기도 했다. 


찌그러진 동전, 상처난 동전, 녹슨 동전 등도 은행에 가져가면 받아줄지 모르지만, 그런 것도 버렸다. 버림을 하지않는한, 언제까지 끌고다녀야 하니,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면서 버렸다. 그래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도 많다. 초중고등학교 앨범은 버렸는데, 대학 앨범은 못버렸다. 버릴까, 하는 말에 나중에, 라는 말이 대답으로 온 것은 어쩔수 없이 끌고왔는데, 우리의 진정한 비움은 아직도 먼것만 같다.


새롭게 시작하는데, 그 새로움을 실천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사하는 날, 이삿짐 센터를 지인의 추천을 받아서 토론토 이사짐센터와 약속을 했다. 시간이 가까와 오면서 토론토로부터 오면 오고가고 6시간 걸릴테고, 이사 날라주는 것등, 아무래도 잘못된 결정 같아서 근방에서 다시 구하기로 했다. 새집 카펫을 걷어내고, 라미네이팅 작업을 해준 메노나이트 목수에게 이사도 맡아하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방의 카펫 공사를 그들에게 맡겼는데, 첫날 지켜볼 수 없어서 언니에게 부탁했다. 언니는 온 집안 사람들이 함께 와서 한다며, 그중엔 중학생쯤 되어보이는 어린 아이도 있다며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겠냐고, 내게 눈치를 줬다. 나도 다음날 갔더니 목수는 안보이고 자식들과 운전수가 일하고, 놀러나온 사촌여동생까지 온가족의 놀이터가 되어있는 중이었다. 나는 목수의 6살 막내딸과 즐겁게 놀며 지내긴 했는데, 숙련공들이 달려들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숙련공밑에 일을 배우는 동생들까지, 이 일이 작업체험장이 된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 목수가 계산서를 가져왔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많이 청구가 되어 있어서 내 얼굴색이 변했다. 따지기 어려워, 놓고 가라 말했는데, 나중에 목수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다며 조정해와서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남편은 일하는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가끔씩 우리집 일을 봐줬던 그 목수를 신뢰했는데, 그나마 청구서를 조정해와서 다행이었다. 


남편이 다시 그 목수에게 이사짐을 의뢰했더니, 7명의 일꾼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다. 나는 또 아주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올까봐, 걱정이 되었다. 7명이 일할 정도가 될까 싶기도 했고. 시간당, 사람당 삯을 주어야 하고. 시간이 길어진다면,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청구될참이다. 목수가 방문했을때 몇명이 올거냐고 물으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올수 있다면서 몇명이면 되겠냐고 물어서 최대 5명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다고 하더니, 나중에 남편에게 전화해서, 부인이 5명만 오라고하는데 7명이 오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더랜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며, 빨리 끝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목수 포함 2명의 중년과 메노나이트 청년들(이번엔 적어도 19살은 넘어보이는), 1명의 트럭운전사(백인)가 왔다. 이사를 4월 23일날 먼저 하고, 1주후 가게정리를 하게 되어있었다. 하늘은 침침해서 비가 오려고 하는 그날, 날씬한 메노나이트 젊은이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트럭에 짐을 모두 실을 수 없었던 점이다. 목수가 짐을 다 살펴보고 갔는데, 가져온 트럭이 좀 작았다. 다 싣지 못한 짐은 나중에 우리가 하기로 하고, 짐을 보냈다. 나는 가게를 보고, 남편과 큰딸, 그리고 오웬사운드에 사는 언니가 집에서 이사하는 것을 지켜봤다.


일은 전체 4시간 30분안에 끝났지만, 나중에 남겨진 것 우리 가족이 나르느라 정말 고생했다. 메트리스, 책상, 상자들. 메노나이트들이 이사한 광경을 가족 채팅란에 보냈더니, 어디서도 볼수 없는 진풍경이라고 말해줬다. 메노나이트들은 모두 비슷하게 보인다. 비슷한 무채색 바지, 셔츠, 어깨허리띠, 밀짚모자등을 쓰고 일한다. 체격도 비슷하고, 어른들은 수염을 기르고 청년들은 날씬하다. 머리 모양이 바가지컷이라고 하나, 모두 비슷하다. 옷도 본인들이 만들고, 헤어샵도 엄마샵 아닐까? 최대한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 손이 투박하고 크고, 말수가 적다. 대장 목수를 따라서 일을 배우는 청년들. 세상 사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아마도 서로 사촌지간일 것이다.


버리고 오고 싶었던 마지막 가구 피아노...^^

메노나이트가 우리가 어리숙해보여서 과다청구한다거나, 단가를 높인다거나, 일을 배우는 청년의 삯도 일반 숙련공으로 요구한다거나 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우리의 의심의 눈과,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노동의 댓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렇게 그들을 보게 된것이라고 믿는다. 남편의 신뢰가 맞을것이다. 나도 남편쪽이지만, 언니는 일터를 놀이터처럼 온가족이 나와서 일했던 것은 아니될 말이었다고 지금도 미심쩍어한다. 말이 나온김에 메노나이트들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와서 일을 짧은 시간안에 끝낸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일잘하고, 성실하고, 저렴한 일꾼들을 적시에 찾는건지 잘 모른다. 이사와 카펫공사가 큰 무리없이 끝난 것으로 그저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메디슨은 우리가 이사가기 전날 가게에 오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모든 구석구석이 모두 깨끗이 치워져 있어서 너무 놀랬다면서. 자신이 꿈꿨는데 그대로 되어있다고 했던가? 어떤 것들은 우리가 이사온 24년전부터 그자리에 있던 것들도 많았다. 전 주인도 치우지 않았던 것들. 정말 이렇게까지 깨끗이 청소해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묵은때를 이사에 맞춰서 벗겨낸 셈이니.


마지막 유리창 청소


젊은 M&D는 재고를 줄여달라고 부탁했었다. 3만불 정도로 맞춰주면 좋겠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적어도 5만불은 될 것 같았기에, 맞추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마지막쯤에는 물건을 거의 하지 않았다. 손님들에게 미안했다. 값이 나가는 fire works를 취급하지 않겠다고 해서 70% 세일로 내놨더니 거의 나가고, 추모기념을 준비중인 린다네집에는 무료로 몇상자를 주었다. 


인페리얼 담배와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3월 즈음해서  새로운 계약서를 쓰라고 해서, 새주인이 하도록 하고, 옛 계약대로 주문을 하겠다고 했더니 담배를 배달해주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네 가게에 부탁해서 따로 받으려고 했기에, 손님들이 오면 다음주에는 올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교롭게도 친구네 가게도 인페리얼 회사에 두 가게 것을 함께 주문했는데, 배달이 다른 곳으로 되어서 받지못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친구네 가게만 기다리고, 그 친구네도 그 문제 해결 때문에 힘들어지고. 결국 이 회사 담배없이 운영해야 했다. 


인페리얼 담배회사는 그야말로 소규모 소매업자에게 하는 행태가 너무 불친절하고 불공정하기까지 해서 속을 끓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관계해야 했던 회사이다. 그 회사 제품을 사던 손님은 잃었지만, 임페리얼 담배회사에 작은 복수를 한 느낌이었다. 몇몇 손님들의 담배취향을 바꿔놓았던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으나,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었던 그 손님은 얼굴을 붉히며, 거의 대들려고 했으니 말이다. 인페리얼 회사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것까지 손님에게 이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음주에는 올거야, 몇번 양해를 했다가는 다음 주인은 취급할 거야, 그랬으니 말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손님들이 이해해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어쨋든 5월1일 장사를 끝내고 인벤토리를 했는데, 딱 3만불 조금 넘게 나왔다. 이제 대망의 5월2일 키만 주면 될줄 알았다. 아침은 멋있게 식당에서 새 주인과 식사를 했다. 새주인 M &D는 서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침장사할 준비를 끝냈다. 우리는 쿨하게 일단 장사를 하라고 그들에게 캐쉬대를 넘겨줬다. 그런데 은행에서 빌리지 않고 통장에 돈이 있던 대니엘도, 그 돈을 은행에서 찾아서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내고, 또 우리 변호사에게 보내고 하는 작업이 생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려서 우리는 가게 뒷방에 앉아 일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 곁에서 장사하는 것 도와주고 먼지를 닦아내면서, 몇시간을 더 있으려니 힘들었지만, 몇달 동안 기다려왔는데 몇시간 못기다리느냐는 동생의 말에 힘을 얻고 마지막 용을 썼다.


거의 은행 마감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 변호사에게서 사인하라고 서류가 와서 사인을 하고 마침내, 그 가게, 그 건물, 24년간 마르고 닳도록 열고닫았던 가게문을 뒤로 하고 마지막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날은 내가 60살 1일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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