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간의 꿈

삶속에 죽음까지도

by mindy


한국에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토론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렇지 않았다. 언니가 심각해지고 있었고, 언제든 마지막 소식이 올것임을 알수 있었다. 언니곁에는 미국동생이 가있었다. 내가 해야할 일을 그애가 감당하고 있었다. 언니는 시편 23편을 낭독하면서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의 한국행이 결정되고 난후 언니는 병세가 악화됐고, 병원에서 권하는 마지막 수술을 안하기로 결정했었다. 수술을 하던 안하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언니가 입원하러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니가 죽음을 집에서 맞고싶다고 했기에, 그에 맞춰 언니를 돕는 사람들이 집으로 방문을 오고 있었다. 내가 토론토에 있을때 언니는 사람들이 오면 주로 거실 소파에서 머물렀다. 그 소파가 가운데가 파여서, 언니는 몇겹으로 요를 깔고 그걸 매번 판판하게 하느라 애썼다. 어느날 조카와 밖으로 나와서 소파에 깔 매트를 샀다. 소파 크기만한 넓이의 매트를 간신히 찾아서 소파위에 놓았는데, 언니가 무진 좋아했었다. 그 소파에 언니가 눕고, 반대편에 누워보니 서로의 발이 코앞에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언니의 몸이 가늘어서 그럴 수 있었다. 언니집에 가면 언니 발가락을 만져주곤 했는데 언니가 그걸 좋아했다. 이야기하면서 손으로 발가락을 가볍게 맛사지하는 일이야, 아무런 일도 아닌데 언니는 힘들다며 그것도 그만하라 말하곤 했는데, 언니와 엇갈려 누워 언니가 내 발가락을 가볍게 맛사지해주어서 그것이 그리 좋다는 것을 나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서로 발가락을 주무르며 실컷 웃었다.


그런데 이제 그 소파를 버리고 병원침대를 들여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는 그러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여러 병원기구가 달려야 하고, 언니가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했다. 언니는 움직이기 어려울때까지도 누군가가 오면 한가지라도 더 먹이기를 원했었다. 언니가 너무 아파진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내게는 더 나은편이었는지 모르겠다.


미국 동생이 거의 3주간 언니와 함께 했고 그 애가 집으로 간후에는 딸이 일을 가지 않고 엄마가 함께 하다가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들곁에서 행복하게 있다가 하늘로 떠났다.


언니의 장례식을 동시간대로 인터넷으로 시청했다. 그 다음날 나홀로 신길동으로 갔다. 언니와 내가 살던 곳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캐나다로 떠날때까지 몇년간 언니가 나를 데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서울 유학생활은 시작됐는데 언니는 신길동에서 미용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있기에는 언니도 힘도 없고, 철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내 유학에 대해 이유를 알수 없어서, 눈물바람, 말없는 소녀였으니, 언니와 성격이 다른 나를 보살피기 힘들어했다. 언니는 그때문에 얼마나 내게 미안해하고, 내게 얼마나 잘했는지. 언니는 형부를 따라 캐나다에 와서 친정식구 한명도 없는데서 사느라, 정말 고생이 말이 아니었었다고 했다. 그런 시간들이 가고, 온 친정식구들을 부르고 우리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있다.


언니와 내가 살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가는 길에 허름한 떡볶이이 집을 만나 그곳에서 요기를 할까 들어갔다. 큰 프라이팬에는 만든지 오래된듯한 떡볶기가 담겨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손님이 나밖에 없는 그집에서 조용히 떡볶이를 먹다가, 주변에 미용실이 있느냐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그 질문은 더 많은 대화로 이어졌다. 아주머니가 왜 밖에서 몇푼 벌지 못하는 이런 일을 하는지,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분의 고통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보탠다. 우리 둘다 울었다. 아주머니는 그분의 고통에 나는 나의 설움에 운 것이리라. 그렇게 위로를 받고 길을 나섰다. 꽤나 햇빛이 따가운 날이었다. 너무 변한, 교문도 찾을 수 없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서 미용실이 보여 들어갔다. 그곳에서 쾌활한 아주머니에게 머리를 맡긴다.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언니를 보냈다. 이세상에서 힘들었던 것 잊고, 나중에 사랑받았던 그것만 생각하고 떠났으면 좋겠다. 딸과 아들의 사랑과, 표현이 없던 남편이 언니에게 한말, "사랑한다" "고맙다" 그 두마디를 가슴에 안고 떠났으면 한다. 나는 언니가 의식을 놓기전에 동생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주라고 노트를 보냈다.


큰언니

언니 아프고 힘든데 나는 잘 놀고 있어.

오늘은 나래아빠랑 수도원에 가기로 했어. 기도와 예배와 노동이 있는 곳이래.

언니를 위해 많이 기도할께. 형부와 우순과 헬렌을 위해서도.


언니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들,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니 곁에 있어서 기뻐.

육체는 약하지만 하나님께 향하는 영은 어느때보다도 더 영롱하리라 믿어.


사랑하는 언니

언니가 내 언니여서 좋아.

넘어져서 아프고 힘들었지?

그것도 잘 이겨내었네.

미가 언니옆에 있는 게 행복하대.

나는 멀리 와있지만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네.


너무 길다고 하려고 그랬지?

이제 그만 쓸께.

하나님 언니를 맡아주소서.






한국에서 많은 꿈을 꾸었다. 가장 큰 것은 나의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맹랑한 생각이었다. 엄마가 60대 초반에 고향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을 온것처럼, 그당시로서는 "끌려온 삶"으로 생각했기에, 이제는 내가(우리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랬다.


그 꿈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삶의 큰 줄기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도 그런 결정을 할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겠지. 보통의 동기를 가지고 결정할 사항은 아닌 것이다.


2달간에 걸친 긴 꿈에 독자로서 동참해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청계천 전 구간을 걸어봤다. 한국의 하천 정비사업의 시금석이 되었을 이곳. 각종 새와 물고기들을 도심에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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