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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n 06. 2023

인천의 비바람속에서 만난 사촌들

대가족 연합회 모임을 꿈꾸며

한국행 가방쌀때 특별히 한쪽편에 넣어둔 것은 검은색 드레스였다. 막내이모님이 입원하셨단 소식을 들었고, 며칠후 요양병원에 옮겼고, 한국방문 하루전 돌아가셨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장례 마지막날, 인사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장례식장이 인천이었어서, 나는 도착하는 대로 장례식장에 갈 계획을 세웠다. 막내이모가 입원하셨을 때 사촌들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에서 소식을 나누면서 회복을 기원했지만,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가족들 만남조차 자유롭게 해주지 않아 이모가 자식들 얼굴을 봐야 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서 그나마 한사람씩 순서를 기다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온가족 둘러서서 보내드리지 못하게 한 요양병원의 처사는 직계가족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 들어도 속상한 일이다.


그래도 한사람씩 순서를 지켜서 얼굴을 다 보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모와는 작년 방문했을 때 몇번 봤다. 이모네 가족, 그리고 남편과 나까지 모두 모여서 얼마나 웃고 떠들었는지 그때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러고나서 나는 하루 이모와 뒹굴뒹굴 보내기도 했다. 이모는 사촌언니가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딸네 곁에서 돌봄을 받다가 아예 함께 아파트로 들어오셨다. 새로 지은 깨끗한 아파트, 볕이 잘 들어오는 고층 아파트여서 이모는 컨디션이 최상으로 보였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엄마를 만난듯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이모와 셀카도 찍으며 함께 놀았다. 마침 친언니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는데, 막내이모를 하루에 3시간씩 맡아보았었다. 언니집에서 자고, 그 다음날 함께 출근했고, 언니가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간후에도 이모와 함께 했던 것이다. 막내이모가 조카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은 "전설적으로" 내려온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어린 조카들이 오면,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고, 맛있는 계란찜을 해서 먹였다. 이모는 몸집이 작지만,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온 거인이었다.


인천에 도착하니 일주일전 한국에 들어온 큰조카가 마중나와 있었다. 큰조카는 이모할머니 장례식장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인천 공항 로비에 캐리어를 부려놓고, 나와 딸은 드레스를 찾아입는다. 이모 장례식장으로 서울 언니와 형부도 오기로 했으니, 그곳에서 만나 다시 서울로 가기로 했다. 


장례식장에 가니,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슬픔에 젖은 사촌들의 초췌한 얼굴이 보인다. 그래도 오랫만에 만난 사이들이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옅은 미소들을 건네주었다. 엄마 집안의 어르신이 이모를 마지막으로 모두 떠나시게 된셈이다. 한국장례식장은 시간 맞춰 갈 필요없는 것이 너무 다행이었다. 향을 피워드리고 그렇게 이모를 떠나보냈다.


막내이모에서 비롯된 이 가정의 베풂은 언제나 감당이 안될 정도다. 외국서 온 우리들 때문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가족들이 함께 하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며칠후 다시 만났다. 그곳은 호텔에서 경영하는 뷔페식당이었는데, 최고급 식당이었다. 나는 음식보다는 가족들을 만나는 마음으로 이미 풍성해져서, 음식 이름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식당이었고,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었다. 대게를 먹고 싶은 사람은 대게를 많이 먹고, 양고기가 있었고, 스시바, 양식바, 한식바 등 어마어마했다. 특별했던 것은 별도의 조용하고 큰 방에서 가족들이 내집처럼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장소를 고르고, 운전을 해준 동생의 댁이 호스트로서 인사말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가끔씩 나와서 소란을 떨게 될뿐, 그들의 삶에 도움을 준 것도 없고 염치가 없다. 


약간의 인연이 있다면  중학생이었던 사촌동생의 딸이 캐나다 단기유학으로 왔을때 2달간 맡아줬던 적이 있다. 그 딸이 커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 지난 방문에서는 내게 밥을 사주기까지 했었다. 그 동생의 댁은 우리 모두를 환영하며, 함께 삶을 나누자는 의미의 발언을 했던 것같다. 그녀에게는 "시"자가 들어갈 뿐더러, 그보다 더 먼 "사촌시누이"가 되니, 끈끈한 정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동생의 댁이 마음을 열어 환영해주니, 우리들은 이제 가족이란 이름으로 결속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동생은 그날 운전사 역할만 하고, 꼭 가야할 곳이 있어서 떠났었다. 어쩌면 남편이 없는 자리여서, 그자리를 의미있게 만들려는 동생댁의 노력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다음날 다시 모여서 인천을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나갔는데, 비가오고 날씨가 흉흉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인천 조카가 월미도 구경을 잘 시켜주었다고 노래를 부르셨다. 그래서 내가 아빠가 가봤다는 "월미도"를 가보고 싶다고 해서 가긴 했는데 비바람이 불어서 쓰고 있는 우산이 뒤집어지는 등 정신이 없었다. 큰 텐트에 이르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촌동생이 "예진"이라는 유명하고 좋은 카페가 있다고 해서 들어가볼까 했지만, 다행히 문을 열기전이어서,  언니네로 돌아가자고 했다. 햇빛이 잘들어오는 사촌언니네 아파트에서 이야기하면서 지내는 것이 어디를 구경삼아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식구들이 모이면 시카고 동생은 발톱에 페디큐어를 해준다. 이야기하면서 줄을 서 기다리면 한사람 한사람 알록달록 발톱으로 변한다. 발톱 무료봉사는 그녀의 기쁨이라고 해서, 이번에는 나도 했다. 덤으로 사촌언니의 집밥을 다시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이번 방문이 모두에게 특별했던 이유중 하나는 시카고에서 사는 셋째 언니 형부가 한국을 방문한 것이 컸다. 앞으로 언제 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두분은, 오히려 건강은 모두 보다 더 튼튼해보였다. 그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방문을 해서, 사촌언니 오빠들의 환대를 받았다. 시카고 형부는 이민 초창기에 겪었던 강도만난 이야기, 돈 번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 키우고 요즘엔 골프로 은퇴생활 보내는 이야기등을 들려주었다. 둘째이모의 딸 천안언니는 이민사를 들어보고 싶었다며, 관심을 보였다.


세계가 좁아졌으니, 이제 시간을 내서 한번씩 만나자,는 것이 우리의 화두였다. 그래서 내가 "Family Reunion"에 대해서 말을 했다. 이곳 사람들이 큰 장소를 빌려서 친인척들 한번씩 모이는 "가족대연합 모임"을 갖는데 우리도 잘 준비하여 그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한국, 미국, 캐나다에 흩어져 사니 자주 할수는 없고, 한 5년마다 하면 어떻겠느냐는 사촌동생의 이어지는 발언에 70이 넘으신 형부는 "나는 그러면 몇번이나 하겠어?" 해서 모두 웃었다. 인천형부는 캐나다 방문을 하셨었다. 록키산맥도 가고, 충분히 즐겼는데 캐나다 방문중 쿠바를 가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된다고 하셨다. 이제 일을 놓게 되면, 캐나다에 오시겠다고 벼르고 계신다. 인천형부와 사촌언니의 주거니 받거니 유머는 같이 있는 사람들이 폭소를 유발한다. 


어느곳 한가지씩 몸이 허약해져가는 우리 모두이기에 이렇게 말을 할뿐이지, 언제 그런 일이 성사될지는 모르겠다. 어쨋든 말을 땅에 뿌렸으니, 그 말이 싹이 나고 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2년에 한번씩 나라를 돌아가며 모임을 하면 좋을텐데 말이다.  14시간 이상을 비행해야 하니,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사람은 일 때문에 힘들고, 나이든 사람은 건강 때문에 힘들고.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말이다.


외할머니 할아버지는 1남4녀를 두셨다. 그중 1남인 외삼촌은 누나들의 "귀염둥이"였다고 한다. 외삼촌에 대한 기억은 나대로 있긴 하지만, 나중에 엄마를 통해서 들은 것이 많다. 그런 외삼촌이 누나들보다 제일 먼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의 큰 아들인 사촌오빠는 그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컸다는 게 우리들도 아는 이야기다. 그 오빠에 대한 소식은 간간히 얻어들었지만, 이번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만났다. 아마도 45년 정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까? 나는 일찍 서울로 전학가서 더욱 오빠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오빠가 우리 3자매가 베트남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날,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나와주었다. 오빠는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 그런지, 사랑을 많이 베푸는 그런 사람이 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이모가 많이 아프기전 이모를 모셔다가 하룻밤 함께 지내면서 극진히 대접했다는 훈훈한 미담까지. 서울 언니는 오빠와 몇달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얼마나 자신을 애취급하는지 모르겠다고 낄낄거렸다.


오빠는 우리를 데리고 무의도까지 갔다. 그곳에서 영화가 촬영됐던 "실미도"가 저쪽이라며 영화이야기를 해줬다. 그날도 비바람이 그렇게 불어서 우산이 뒤집어지고 했는데, 인천의 속모습을 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오늘 뉴스에 무의도에서 해우질하다가 몇명이 참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바람속 그 무의도를 걸어들어가봐서, 그 뉴스가 그리듯이 보인다. 한번도 보지못한 올케언니 자랑도 실컷 해주더라. 매일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준다고. 너희들도 남편들 잘 보살피라면서 말이다.


저녁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수 있는 사람 다 오라,는 오빠의 당부가 있어서 아이들을 빼고 모두 모였다. 연안부두의 한 횟집이었는데 우리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이 횟집은 60첩 반상이었다.  4명이 한조로 상차림이 나오는데, 접시위에 접시가 포개지는 모양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물회도 있고, 없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삼계탕도 나온다고 하는데, 필요없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벌린 입을 다물어야 먹을텐데, 감탄하느라 먹기가 힘들었다.



캐나다 미국 서울 촌사람들이 인천에 와서 너무 대단해서 "항복"을 외쳤다. 나중에 사촌오빠의 남동생을 만나서 우리가 대접받은 이야기를 했더니, 그 동생왈 "형은 그럴만도 하다. 고모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같은 형제여도 고모들은 나를 거들떠도 안봤다"고 말했다. 어쨌든 엄마와 이모들 때문에 혜택은 우리가 받게 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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