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더니

두 나라를 살다(2)

by mindy

6명의 대가족이 스며든 곳은 언니네 아파트였다. 틴에이저 언저리에 있는 남매와 언니 부부가 사는 3 베드룸 아파트. 조카방과 거실에 흩어져 잠을 자고 대가족이 함께 사는 피난민 생활이었다. 그당시 큰 그로서리 쇼핑에 온가족이 함께 가곤 했다. 썬키스트(큰 오렌지)를 우리가 잘 먹는다고 형부는 한박스씩 사곤 했다. 얼마후 모두의 발바닥, 손바닥이 노랗게 물들어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민 2주 만에 취업을 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경력을 이어주는 그런 일을 하다가 가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형부는 지인에게 나를 부탁했고, 교민 신문사 간부였던 그분의 도움으로 이력서를 써 들고 신문사를 찾아갔다. 고등학교때 가사과 선생님이 나를 보면서 "너는 편안한 인상이라 그덕을 많이 볼 것같다"고 말해줬었는데, 면접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르곤 했고, 그런 부분이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은 약간은 뾰족한 인상이라서, 그때문에 고충을 많이 겪으셨지 싶다.


그 당시 5자매들은 "누가 먼저 운전을 배워야 하나"로 피 튀기는 싸움을 했다. 운전은 첫 번째 생존 관문이라 꼭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쩌면 당연히 내게 모든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취업에 성공했고, 매일 출근해야 하는 내가 운전면허를 갖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운전학교를 우선 등록하고, 이론과 실기를 배워야 하는데, 그 당시에 수강료가 만만치 않아, 모두가 배울 수는 없어서 순번을 정하는 게 그리 어려웠다. 동생들은 자신들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데, 운전하지 않으면 출퇴근이 불편하다며, 교회에서 만난 친구에게 운전을 배우겠다고 하는 등, 중구난방으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운전면허를 누가 먼저 따느냐가 문제지, 운전학교 수강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운전학교에서 배워야, 보험료가 10% 할인된다고 해서 운전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에서 수강생에게만 제공하는 실기를 흑인강사에게 배웠는데, 그야말로 나는 가족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운전 고시"를 통과한다. 5번째 운전시험에 떨어졌을 때 함께 가준 형부를 볼 면목이 없었다. 불합격 이유도 다양해서, 운전에는 요행으로 붙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니, 운전에 관해 A-Z을 알아야 붙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흑인강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깡으로 버텼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캐나다 입성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회사를 다녔다. 버스를 타면, 나 홀로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버스안의 다른 승객과 다르다는 사실, 나의 언어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나는 이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때면 추위와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문사 생활 초반에는 내가 바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적응이 쉽지 않았다. 언니네 아파트 근방에 살았던 고참이 있어서,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마음도 처음에는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확실한 선을 긋는지라, 깜짝 놀랐다. 이민초기 "약자"를 자칭했던 내게 던져진 도전이었고, "각자도생" 하는 것이란 것을 그 고참을 통해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니 그 고참이 무시하듯 쳐다보는 것도 견딜만 해지고, 일은 그럭저럭 흥미로왔다. 편집기자로 들어갔지만, 여성, 종교 등의 취재거리가 있으면 내게 할당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캐나다 한인여성회 취재를 나갔던 그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민여성들이 회의를 진행하는데 회의가 군더더기가 없고 예리하며, 똑 부러지는 의견 개진들이 있었다.


첫 번째 인터뷰했던 분도 기억난다. 음식점을 차린 그분의 이민 여정을 들어보면서, 이민지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구나. 그가 현지와 부딪치면서 개척해나가는 모습과 그에게 닥친 문제들, 사기사건 등 그런 것들을 들어주고, 써내고 했는데 그 글이 지금까지 생각난다. 또 하나는 기자칼럼이란 란이 있었는데 1989년 몬트리올 에콜 폴리테크닉 여성 학살 사건을 회고하며, 양성평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글이었다. 여성 혐오자가 칼리지에 무장한 채 들어와, 남학생들은 내보내고 여학생만 골라 죽인 그 사건은 내가 캐나다에 와서 겪은 가장 큰 사건이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갈 시한을 마음속으로 잡은 것은 2년 후 정도였다. 2년이면 가족들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6개월쯤 언니네서 지내다가 스카보로 지역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1989년 그 당시에 토론토 지역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던 때였는데 캐나다 경제에 둔하고, 돈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우리 가족들은 집에 반해서 지역 불문, 가격 불문, 그 집을 사게 된다. 그 지역은 토론토 동쪽 스카보로로 우범지역으로 알려져, 한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이었다.


그즈음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대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선 아무런 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집에서 기운을 못 차리고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이 당시에 가족 구성원 간에 있던 알력과,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맘고생으로 그런 병이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캐나다 땅은 처음이고,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외국이란 땅에서 엄마의 지위는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피아노 강사였던 언니는 피아노 교습소를 올케에게 모두 주고 캐나다로 오니, 아무런 것도 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 편의점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언니에게 적당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꽃집을 운영하던 교회 집사님이 언니에게 일자리를 줘서 꽃가게로 파트타임으로 나가게 된다. 엄마는 집안 살림을 맡으셨고, 몰게지 납부등 경제적인 것은 언니가 돌봤다. 나는 돈을 버는 일을 맡았고, 동생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누구 한 사람이 이끌어나간 것은 아니고, 큰일에는 서로 목청 높여 싸우면서 집안을 이끌어나갔지만, 꽤 민주적인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토론토에서 청년모임을 찾아보았다. 내가 속해있던 민족학교와 비슷한 그런 모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 민족교육문화원이 있었다. 나는 이 청년모임에 가입한다.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나중에 이 문화원은 윤한봉 씨가 설립한 재미 한국 청년연합의 토론토 지부였다.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미국 동부의 한 지역에서 열리는 연합 수련회도 참석했었다. 한국사회와의 단절감을 이곳에서 해결하려 했던 것같다. 몸은 캐나다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을 떠나지 못했던 나를 볼수 있다.


나는 그 이듬해 여성회 회장, 깔끔한 회의진행으로 나를 감동시켰던 그 분을 통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결혼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는데, 운명은 나를 그에게로 이끌었다. 가족들의 약간의 반대에 부딪친 나는 이 사람과의 결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만약, 이 남자의 숨겨둔 여자가 나타난다면, 보따리를 싸서 이 땅을 떠나리라,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더니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또한 언니는 그동안 나의 월급에서 몰게지를 갚아나가던 중이라, 내 결혼을 반대했다. 언니는 빠듯한 수입과 지출이 매달 있어야 하는데 동생이 결혼한다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중에 미안하다 했다.


결혼 후 딴살림을 차렸고, 집에는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보냈다. 남편도 공부하다가 산업전선으로 복귀했다.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일 순위가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남편은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일했다. 30여 년 전만 해도 "self Serve"가 많지 않아서 일일이 점원이 기름을 넣어주어야 했다. 그렇지않아도 춥기로 유명한 캐나다에서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세찬 바람앞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겨야하는 극한직업에 가까웠다.


얼마 지나 첫아이가 생기고, 따로 살던 우리는 렌트비를 아끼고, 아이도 맡겨야 해서 친정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친정집 지하실에서 우리 신혼이 계속된다. 둘째애까지 낳고, 나와 남편은 출퇴근을 같이 한다. 남편도 실업인협회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나는 신문사 다니면서 직장에서 만난 젊은 가족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결혼 한 지 얼마 후 한국 청년연합회를 탈퇴한다. 약간은 보수적인 신문사에서 "요주의 인물"이 될까 봐 불안했던 것 같다. 그때 내 변명은 한청년 회원으로 있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민간인 자격으로 있는 것이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둘러 말했는데, 사실 결혼하면서 안정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고 보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먼옛날의 희미한 기억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결혼은 내가 캐나다에 오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고, 캐나다에 남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결혼은 내게 인생의 대변혁을 맞게 해주는 가장 큰 이유가 된셈이다.


그리고 또하나, 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된 계기가 있기도 하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캐나다 이민에 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나의 철없는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한분이 "왜 이곳에 있느냐, 돌아가라"고 성을 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된 그분의 사정은 아르헨티나를 통해,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내게 있는 영주권이 어떤 사람에게는 "반드시 가져야할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이상 "돌아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안하게 되었다.


셋째 출산을 앞두고 7년간 일했던 신문사를 나왔다. 셋째가 미숙아로 나와서 병원 인큐베이터에 1달 정도 있었다. 그때 캐나다의 전액 무료 의료보험 제도에 대해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달 먼저 세상에 나왔던 그애는 위급상황까지 갔었는데, 살아남았다. 캐나다땅에 큰 빚을 지게 된다.


신문사 복직을 포기하고 그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도서대여점"을 한인타운에 열었다. 미국 엘에이까지 가서 프랜차이즈 계약을 하고, 그 회사로부터 책을 공급받고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그러나 결국 2년 만에 서점 문을 닫게 된다. 그때 들어갔던 창업자금은 은행에서 빌렸었는데, 마지막 세일에서 한 사람에게 일괄 판매 해서, 큰 빚을 지지 않고 좋게 망하게 됐다. 사업에 문외한인 내가 일을 벌인 것인데 수익성도 없고 이민지에서 책을 빌려볼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해 벌어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를 낳고 언니가 서점을 지켰는데, 어느 날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야, 오늘 손님이 하나도 안 왔어"하는 게 아닌가? 언니는 너무 기가 막혀서 그리 말한 것이었다. 깨끗이 두 손을 들게 된 순간이었다.


가게를 접고 세 아이를 키우던 그때, 아이 우유값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 모뎀을 팔기도 했다고 남편은 나중에 말했다.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해나가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할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다른집 아이 맡는 것등을 해보기도 했지만, 살아나갈수록 쪼들려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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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인구 1,000명의 작은 마을 페이슬리(Paisley)에 있는 편의점으로 오게 된다. 남편이 실업인협회 일을 하면서, 소개받은 곳이었다. 그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 가족이 이 일을 잡게 된 것은 또한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했다. 손을 빌릴 데가 많지 않았던 우리들은, 주변에서 처음에는 도와줄 듯하다가도 뒤로들 빼니,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리저리 방법을 찾던 우리에게 그 가게 중개를 맡은 부동산업자의 주선으로 은행문을 두드리게 된다. 가게가 달린 2층 건물을 1998년도에 20만 불에 샀는데, 그 돈의 90%를 은행에서 몰게지로 줬다. 최근에는 규제가 많아져서, 자금이 없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20여년전만 해도 그게 가능했다. 빈털털이였던 우리들이 살 곳과 돈 벌 곳을 마련한 순간이었다. 처음엔, 병원신세를 지고, 그 다음엔 은행신세를 지게 되니, 우리는 명실공히 캐나다에 빚진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때부터는 아이들과 생존하기 위해 거의 모국을 잊고 살았던 시간들이었다.


몇 년 후 가게 하나를 더 오픈했다. 30분 정도 걸리는 더 작은 마을 티버튼(Tiverton)에 가게가 나서 그걸 인수했다. 나중에 가게가 있던 건물까지 매입하게 됐다. 그 당시가 가장 바빴다. 아이들도 어려서, 동네 아이에게 베이비시터를 부탁하고, 직원을 두고 나와 남편이 번갈아가면서 두 가게를 지켰다. 마음 놓고 화장실 사용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즈음에 나는 한국에 있는 언니의 부탁과 시댁 쪽 사촌누나의 부탁으로 우리 집에 유학생들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을 거쳐간 유학생은 언니네 2명, 형부 쪽 조카 1명, 사촌 오빠네 2명, 시댁 쪽 조카 1명 그 애의 친구 1명이었다. 우리 집은 가게가 아래층에 있고 2층에 3개의 아파트가 있어서 여러 사람 함께 살기에 좋은 조건이다. 처음에는 4 아이가 함께, 2차로 3 아이가 함께 있었다. 게다가 우리 집 꼬마 3명까지. 아침에 7 개의 도시락을 싸려면 눈에 불을 켜야 했다.


그리고 또 생각이 나는 건, 겨울방학을 이용해 2달간 우리 집에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언니가 한동안 우리 집 아파트 3호실에 머물렀었는데 언니의 친구가 영어를 가르치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겨울방학 동안 우리 집으로 캠프를 오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 집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해서 잘 어울리면서도, 서로 싸우는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내게 부탁해오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락했던 일들이었다. 그 와중에 보람도 있었지만 큰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유학생들을 데리고 있었던 일들도 어언 먼 과거의 일로 돌아갔다. 30여년전 이민온 다섯자매중 두명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60대에 이민오신 엄마는 이제 90대 노인이 되셨다. 옛것을 기억하고 묶어내는 능력이 나는 많이 떨어진다. 자매들의 이야기와 엄마의 이야기까지 해낼 수 있을까? 누가 하라는 사람이 없으니, 오로지 나의 결정에 달린 일이다. 사실은 본인들 입으로 하게 될지도 모르니, 나는 조용히 있는 것이 나을것 같기도 하다.


60이 넘어 어떻게 미혼자녀들을 데리고 이땅에 오실 결정을 했는지, 나는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놀랍다. 어쩌면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삶에 어떤 돌파구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은 두나라를 살게 됐다.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이런 가정법을 써보긴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두었기 때문에 엄마때문이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돌아가기로 작정했지만, 쉽게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했다. 이민 시작이 잘못되었으므로, 끝내 고통을 받게 된다. 삶의 기본인 영어등 학습에 등한했다. 그렇게 이민연수가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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