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라를 살다(1)
1988년 종로의 한 카페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모였다. 누구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모두는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었고,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 자리에 나왔다. 꿈속 같은 그 광경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너 그때 그 자리에 있었지?" 하고 물어보면, 그들의 기억은 가물가물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겐 중요했지만, 그들에겐 많은 다른 날 중에 하루, 몇 시간이었을 수도 있으니.
“민디네 가족이 이민간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중이다, 우리 한번 이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것이 안건이었다. 대학친구, 사회에서 만난 선배등 함께 불렀었다. 서로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나의 이민의 고민을 친구들과 함께 나눴다. 그때는 그들이 나를 잡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게다.
"이민"은 내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87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이듬해 모든 것이 정리된 후 엄마는 캐나다로 이민을 추진하기로 하셨다. 이민을 계획할 때만 해도 엄마와 미성년인 두동생이 따라가는 그런 계획이었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큰언니 내외가 친부모 초청으로 엄마를 모셔오기로 했고, 19세 미만이던 두 동생만 동반 자녀로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엄마는 캐나다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미혼자녀 동반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엄마는 남겨질 3명의 미혼자녀와 함께 이민을 갈 수 있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셨다. 캐나다는 그때 마침 이민법이 바뀌어 19세 이상이더라도 미혼자녀면 동반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케이스에 우리가 적합하다는 게 엄마가 전해준 이야기다. 그래서 이민신청서에 3명의 딸들 이름을 더 적어 넣었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 세 사람은 조금씩 입장이 달랐다. 나이가 많지만 혼인을 하지 않았던 언니는 단박에 "O.K."를 했고, 나와 내 밑의 동생은 처음엔 "안 가겠다"고 맞섰다. 나는 동생보다도 "가고 싶지 않다는 쪽으로" 더 강경한 입장이었다.
우선 나는 "외국"에 대한 어떤 동경도 없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영어"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처럼, "영포자"가 되어 대학에 간신히 들어온 후 영어를 저 멀리 던져버렸었다. 영어와 관계된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기쁜 일중에 한 가지였다.
그랬는데, 영어권 캐나다로 가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캐나다 이민에 대해서 어떤 준비도 없었다. 집안이 이민 문제로 뒤숭숭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의 강경한 "이민 거부" 발언에 굳은 얼굴로 오빠가 좀 보자고 했다. 오빠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평소 소통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가 정색하고 "나는 너를 책임지지 못한다. 너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혼자 살려고 그러냐”고 다그쳤다. 원래도 오빠에게 짐을 지운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오빠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결혼하지 않았던 일이, 그리 큰 문제가 될지는 몰랐다. 오빠가 이복오빠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사건처럼 생각됐다. 친동생이었다면, 결혼하지 않았다고 가기 싫다는 동생을 그리 매몰차게 보냈겠는가 하는 원망이 들면서, 오빠와 더 선을 긋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 좀 많이 운 것 같다. 내가 남아있는 것이 누군가의 부담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서러웠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 한 나는 캐나다에 가야 할 것 같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날 카페에서는 "민디 결혼시키기" 주제로 이야기가 퍼져나간 것 같기도 하다. 선배 하나는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나는 최대한 결혼 가능 대상자를 고른다는 입장을 세우고, 한국에 남겠다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했다.
그때 출판사에 다녔는데, 월급은 많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나름 인정받기 시작할 때였다. 회사 사장을 만나, 이민 이야기를 하니 사장은 "직업적으로는 책임지겠다"며 일을 계속하라고 말했다. 그 제안이 무척 감사했다. 이민 시한 몇개월을 남기고 선배가 주선한 소개팅도 해보고 한국에 남기위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결혼상대자”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결국 소개팅으로도 안되고, 데이트할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나는 일단은 캐나다로 가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캐나다에 있는 형부와 캐나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핑크빛 기대와는 다른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형부와의 전화를 통해서 느낀다. 엄마는 "캐나다에 가면 모두 공부할 수 있다"며 우리들을 꼬드겼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벌어야 한 명이라도 공부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누군가는 결국 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 할 수 없다. 캐나다에 가서 가족들이 안정이 된 후에 돌아오자,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마음을 다지기 시작했다.
종로의 그 카페에서는 "우리 땅을 떠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로부터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나왔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닌 대학은 "운동권"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어서 대체적으로 시위 등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대학 때 빼놓은 그것,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시민들이 주축이 된 "민족학교"라는 곳에서 낸 회원 모집 광고를 신문에서 봤다. 나는 그들의 취지를 읽고 그곳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등산도 하는 등, 학생운동처럼 과격하진 않지만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의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배웠다. 사회과학 서적은 왜 그리 어렵고, 지루한지. 사실 직장 다니면서 그런 공부를 할라치면 카페든 술집이든 어떤 장소에서건 앉았다 하면, 나는 졸음이 오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긴 했다. 그래도 "의식 있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신났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제대로 된 사회인식을 갖게 될 것 같았다.
그런 와중이었는데, 이민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 인간으로 여물기 전에 내게 닥친 이 문제에서 나는 일단 백기를 들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그날 카페에서는 "나는 가지 않겠다"라고 확언했는데, 결국 약속을 깨고 이민길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