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에 살아보다

"관리"에 헉헉댔던 그때 그 시절

by mindy

전원주택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턱을 빠뜨리고 지켜보았다. 유튜버 부동산업자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과, 그 집이 갖고 있는 총체적인 장점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 집에만 가면, 모든 행복이 저절로 굴러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전연 상관없는 한국의 주택을 소개하는 데도, 한번 살아보고 싶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걸 보니, 새로운 곳, 마음을 끄는 곳에 둥지를 틀고 싶어 하는 주거지에 대한 욕구가 다시 꿈틀대는 게 느껴진다.


나도 한때는 -이란 말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젠 가끔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 많은 이가 탐낼만한 그런 전원주택에 살았었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은, 어쩌면 나 같은 이들이 있다면, 한번 더 생각하게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나도 이 시절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집"에 대한 욕심은 자연스럽게 찾아왔었다. 집이지만, 집이 아닌 데서 살고 있는 느낌은 먹고살만해지면서 스며들었다. 가게 2층 살림집은 가게를 운영하기엔 적당했지만, 주부가 꿈꾸는 그런 안락한 보금자리는 아니었다. 특별히 아름다운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방문하거나 하다 보면, 그런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주택문화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하여 느끼지만, 젊은 시절 한국을 떠나온 우리 가족이 매혹되었던 캐나다 문화중에서 "주택"을 빠뜨릴 수 없다. 30여 년 전 이야기다.

서울 변두리 작은 전셋집을 전전하던 나도, 처음 캐나다에 와서 우리 집(친정집)을 구하게 됐을 때, 그야말로 부동산업자가 어떤 집을 보여줘도, "세상에 없는" 파라다이스를 본 것처럼 좋아했었다. 캐나다 전통 주택의 구조는 잔디밭이 있는 전경과, 너른 뒤뜰, 햇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과 식탁 자리가 있는 주방 그리고 붙박이 옷장이 있는 침실, 곳곳에 수납장 등 기본적인 가구가 이미 구비된 그런 주택이었다. 우리는 이민 오자마자 우리를 초청해준 큰언니네 집 아파트에서 엉겨있다가 주택을 구입해 분가했을 때 드디어 명실상부 캐네디언이 된 것 같은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나도 한 가족을 이뤘고, 무일푼에서 시작한 캐나다 살이었는데, 경영하던 가게를 하나 더 늘리고, 얼마 후에 그 가게가 있던 건물을 사게 됐고, 또 그 건물을 팔고 나니, 모게지를 갚고 나서도 손에 쥐어지는 약간의 목돈이 들어왔었다.


그때부터 속에 있었던 집에 대한 욕구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현재 살고 있는 살림집도 있어, 굳이 집을 살 필요가 없었는데도, 집 쇼핑 중 어느 한집에 완전히 마음이 꽂혀서 말도 안 되는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그 집을 사게 됐다.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그 집을 구매하는데, 올인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해낼 수 있다.



그 집은 그야말로 자랑할만하였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더 들여다보자면, 그만한 집이 그 집 한집뿐은 아닐 텐데, 누군가 그 집을 채갈까 봐 속을 끓이며 구매를 서둘렀다. 살고 있는 집은 한물간 헌 애인처럼 내던지고, 새 애인에게 빠져 버선발로 그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그때의 희열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하였다. 드디어 인생이 이렇게 "성공"이란 이름으로 끝나는구나, 이런 생각까지 했을 수도 있다. 그때가 2006년이었다.


우리는 대가족이었고, 그 당시 친구도 많았으며, 아이들도 십대니 활발히 놀 때이고, 모든 것이 꽤 장밋빛이었다. 그 집을 대충 이야기하자면, -하도 자랑을 많이 해서 입이 아프지만-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동네의 막다른 곳에 위치한 언덕 위의 상아색 벽돌집으로, 앞쪽으로 꽤 넓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긴 드라이브웨이는 한쪽은 메이플 나무가 줄나라비 서있고, 한쪽은 돌담이 쌓여있다. 집은 2층 집으로 창이 많은 집이다. 뒤쪽으로는 작은 호수 사이즈만 한 큰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연못 주위로 소나무 숲으로 다른 지형으로부터 구분되어 있어, 완벽한 사생활이 보호된다. 전체 집터는 5.3 에이커로 1 에이커가 1224평이라니, 6,500평 정도라 볼 수 있으니 대충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꼭 이야기해야 하는 부분은 이 집을 우리가 살 때 30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우리가 재벌이 아니라, 시골집이었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했고, 나는 이런 집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집을 구매했었다. 나름대로는 투자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것도 같다.


집의 전경


집 내부도 꽤 정성껏 지어졌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지하에는 작은 바가 있어서 그것도 자랑거리가 됐다. 책장과 책상이 붙박이로 꾸며진 것, 지하 한쪽 편에 짜인 벽장 등, 이것저것 수납할 공간이 너무 많아 그것도 마음을 끄는 요소중 하나였다. 갑자기 "소유"한 것이 너무 많아져 초기에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남편은 안방이 너무 넓어서 겨울에 추운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는데, 마스터 베드룸이란 어떤 것인지 잘 알려주는 집이었다.


사실 그 집에서 살 때 즐거운 일도 많았다. 많은 모임을 우리 집에서 했고, 친구들을 자주 부르기도 했다. 한국 어머님 칠순잔치, 한국 가족들 방문, 토론토와 미국 가족 방문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를 수 있어서 내 마음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마음껏 하게 되니 살맛이 나기도 했었다.


이제 그 집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집을 구매할 때 큰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전주인이 관리가 힘들어서 판 것 아닐까?" 나는 그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었을 뿐 아니라, 속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아니, 캐나다에서 살면, 그 정도의 일은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냐? 설마 관리가 힘들어서 집을 팔았을까?" 하면서 궁시렁거렸다. 몇몇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은, "관리가 힘들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다. 사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 관리의 대부분은 남편이 담당할 몫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 "관리"가 어느 정도 일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사 들어온 후 아름다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낙엽을 다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간신히 낙엽을 대충 치우고 나면, 겨울이 온다. 겨울이면 그 긴 드라이브웨이에 눈이 쌓여 치우지 않으면 차가 집 밖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 역시 남편의 일이다. 그리고 긴 겨울을 지나 아름다운 봄이 오는가 싶더니만,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하는 잔디는 막 자랄 때는 1주일에 한 번씩 깎아주어야 한다. 가게도 봐야 하는 남편은 잔디 깎기를 이틀 삼일에 걸쳐서 하기도 했다. 나는 정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아름다웠던 정원이 차츰 형편없어지기 시작했다.


낙엽이 쌓여가는 드라이브 웨이. 이걸 겨울 오기 전에 대충 다 치워줘야 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집 관리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지기는 했다. 그런데 힘들었던 것 중 최고봉에 속하는 것이 "겨울 출근"이었을 것 같다. 이것도 남편이 당한 일.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가게로 가야 하는데, 마침 가게와 집 사이가 눈폭풍이 잦은 곳이라, 출퇴근 때마다 힘겨웠다. 그래도 가게가 있는 마을에 사는 사람을 헬퍼로 쓰고 있어서 그녀에게 가게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아침에 문 여는 것을 아예 그녀에게 맡기고, 남편은 낮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좋게 말해서 나의 "낭만"에 대한 남편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혹독"했다. 그랬더라도 유지가 되었다면 더 오랫동안 이 집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이사간지 5년 정도는 여러 사람이 좋아해 주고, 추켜주는 맛에, 그리고 그 집이 주는 만족도에 취해 살았다면 그 이후부터는 현실적으로 조금씩 힘들어짐을 느껴야 했다. 관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경제적으로도 빠듯해진 것이,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들어가야 할 돈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캐나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을 보조해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는 우리가 주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이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가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차츰 느끼게 됐고, 아무래도 집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돈에 쪼들리자 집에 있는 귀금속을 파는 이야기가 마침내 생각났고, 금목걸이, 딸 돌잔치에 들어온 금반지 등을 팔아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갖고 있던 것들을 팔고 몇 푼을 손에 쥐고 헛헛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결국 하우스 푸어의 삶을 나도 겪게 된 것이다.

초겨울에 찍은 사진. 왼쪽에 있는 집은 이 집을 팔고 새로 지어 이사 간 전주인 집.


집을 너무 좋아했던 만큼 다시 팔기로 하는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팔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들을 거쳤다. 집 뒤뜰에 우리도 모르던 오일탱크가 묻혀있음을 부동산업자가 발견해냈고, 집을 팔기 위해선 그 탱크를 제거하는 동시에 그 땅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야 했다. 우리에게 집을 판 그 부동산업자에게 다시 내놓았는데, 그때는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었는데,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가려고 하니 그것이 발목을 잡았다. 이렇게 되니 이 집을 벗어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좋은 집도 우리가 건사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가 좋은 것이지, 꼼짝없이 이곳에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족쇄가 되어갔다. 이런 마음고생을 거쳐, 오일탱크를 들어내고, 우리 집을 마음에 있어하던 대가족에게 집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 집을 팔고 다시 가게 2층으로 복귀한 것이 2016년이다. 10년간은 영욕의 세월이 함께 했다. 세상적으로 뻐기는 마음과, 한계에 부딪쳐 허우적대다, 헌신짝처럼 버려뒀던 건물 2층 살림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월 말이다.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우리들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아이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학교를 옮겨야 하지 않냐며, 다른 마을, 큰집으로 간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했는데, 이사전에는 아이들의 마음이 돌아오리라 낙관했었다. 더군다나 그 큰집에서 막내는 우울증을 얻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그 집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다. 아이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었으니,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막내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것 아니냐, 하는 한탄이 내겐 있다. 이사는 어른보다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 위주로 결정해야 했다. 학교를 옮긴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좋은 환경을 마련해준다는 욕심 앞에서 세세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막내는 나중에 말하길 "왕따"를 경험했다고 했다. 이제서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남편도 그 집에서 나오고 나서야, 자신이 "번아웃" 되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한의원과 가게를 경영하고 집을 관리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나중에 그 모든 것에 지쳐갔던 것이다. 남편도 이사 오고 나서 새로운 기운을 찾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왜 그리 "집"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이사 들어온 이 집은, 살만하게 리노베이션 해서 그런지, 우리에게 딱 맞는 보금자리가 되어있다. 삶에 대한 철학은 없이, "좋은 집"만을 꿈꾸고 살았던 젊은 날의 내 자화상을 반성한다.


혹시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감당할만한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자녀가 있다면 자녀들의 의견과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여 결정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집을 팔 때 10년 전 가격에서 1.5배 오른 가격에 팔았으니,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고 위로하긴 한다. 그리고 그런 집에 살아봤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게 될테니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