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유리의 도시 / 유령들 / 잠겨있는 방
눈가가 검으칙칙한 드라큘라 이미지의 작가, 폴 오스터.
그의 책 날개에 있는 사진만으로도 작가는 독자들과 친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오히려 공포감을 주고 싶지나 않은가 의심하게 만든다.
뉴욕 3부작중 1부 유리의 성에 나오는 소설속 주인공은 추리소설이라면 거의 무비판적으로 읽는다는 추리소설 작가이다. 추리소설은 아주 형편없는 것을 빼고는 항상 재미있게 읽었다는데. 나는 추리소설은 읽지 않았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추리소설도 그 범주에 속한다고 속단한 독자들중 한사람이다. 그런데, 숨도 제대로 쉬지않고 단숨에 읽게 만든 이 소설도 말하자면 추리소설의 한 종류란다.
나는 뉴욕3부작을 현란한 도시생활,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골랐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부합되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뉴욕의 이야기지만, 아주 협소한 골목길만 헤매고 만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내면을 향하여 숨어들고,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들을 등지고 타협이 불가능한 곳으로 달음박질친다.
이 책에는 3편의 중편이 들어있다. 각 이야기가 나름대로의 완결구조를 갖고 있지만,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독자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가슴 한쪽에 간직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감상한다. 그러나 2부, 3부의 책장을 다 넘기기까지 어느것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1부에 언급된 등장인물이 3부에서 엉뚱하게 한두번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 인물들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들이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나 해서,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해 검색해봤다. 그의 3부작을 놓고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누구도 명쾌하게 고리들을 풀어내지 못했다. 많은 복선은 오히려 작품해석에 혼란을 주고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 내용들도 많아, 책에 주눅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순전한 언어를 찾아헤매는, 자신의 아들을 실험하기 까지 하는 학자 스틸먼의 천재성은 독자들이 따라가기에 버겁다.
2번 읽는 수고를 들인다 해도, 어쩌면 마찬가지 일 것 같아, 작가의 의도가 어떤 사건을 꿰맞추는 그런 추리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엉뚱한 해석은 면해야 겠기에, 인내심을 갖고 1부와 3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미완성의 퍼즐이라는 결론에 다시한번 이르렀다.(말하자면 추리소설이 갖고 있는 범인찾기와 내용 꿰어맞추기가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가 본인의 입으로 풀어주지 않는한 평범한 독자가 이 내용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하나의 일관된 플롯안으로 끌어들이기에 어려움이 있다. 세편을 굳이 한권의 책으로 묶어놓은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줄거리는 아닌 것 같다. 독자들이 미로를 헤매며, 결국 찾아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저자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세편은 모두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다. 사람을 감시하고,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감시자, 쫓는자가 오히려 궁지에 빠지는 그런 뼈대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중 하나가 “이름”에 대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름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정체성의 핵심 부분이다.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의 한 인물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봄으로 책속으로 조금 들어가보자.
1부 유리의 성에 나오는 대니얼 퀸. 그는 추리소설작가이다. 평범한 그에게 삶을 바꿀만한 사건이 닥친다. 바로 부인과 아들의 죽음이다. 그는 그 이후, 자신의 이름은 감춘채 윌리엄 윌슨이란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산다. 그는 출판사와도 우편으로 거래하고 대리인을 통해 모든 일을 해결한다. 누구에게도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서, 때가 되면 고정적으로 책쓰는 일에 매달려 글을 쓰고 그 수입으로 먹고산다. 그는 그의 추리소설의 사설탐정으로 등장하는 맥스 위크가 자신같다고 때론 생각한다. 윌리암 윌슨은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통용된 이름이지만, 그것에는 생명이 없고 퀸도 심정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없다. 그런 그가 또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그건 폴 오스터란 이름이다. 한밤중에 폴 오스터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유명한 사설탐정을 찾고 있다며. 퀸은 재미삼아 자신이 폴 오스터 행세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기이한 여정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퀸은 윌리암 윌슨, 맥스 위크, 폴 오스터를 두루두루 거치는데, 자신의 정체성은 그 모두에게 있기도 하고, 또 어느 것도 제 자신의 정체성을 담보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이 미궁과 같은 뉴욕 도시의 길과 합쳐지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보여준다.
2부 “유령”편에는 “색”들이 등장한다. 블루, 블랙, 화이트 그리고 오렌지 거리.
블랙이 하는 일을 감시하는 탐정 블루를 그리고 있는데, 특별한 일없이 하루종일 무언가를 쓰는 블랙을 살피는 지루, 지루, 지루해 미칠 것 같은 블루를 쫓아가는 독자들은 긴장, 긴장, 긴장을 벗어날 수 없다. 대단한 흡인력이다. “돈”을 주면서 블루에게 일을 맡긴 “화이트”는 작가(심리, 혹은 추리소설 작가)로 자신을 감시하는 “블루”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화이트와 블랙은 같은 사람인데 독자와 블루는 그것을 거의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감시자와 감시받는 자가 바뀌는 설정이며 이를 깨닫는 블루는 급속도로 피폐해간다.
글쓰기를 위해 이 일을 꾸민 화이트를 통해 보면 무언가를 “창작”해 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이 되는 일”이다. 3부 “잠겨있는 방”에서 작품만 남기고 스스로를 방안에 가둬둔 펜쇼라는 화자의 친구도 그렇고, 퀸은 소설을 쓰다가 탐정일을 맡고 그 일에 몰두하다가, 붉은 공책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는데 그들 모두 자신이 소멸될때까지 자신을 버리는데 몰두한다.
천재기질이 있지만 일상에선 평범했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변화되고 일그러지고 잊혀진다. 변화된 그들은 더 이상 그전에 존재했던 그들이 아니다. 거리에서 딱 마주친다 해도 알아챌 수 없는 거대 문명의 한 파편들이 되어간다. 아니, 천재들뿐 아니라, 무언가에 편집증적인 현대인들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겠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런 이들을 그리기 가장 적합한 도시인지 모른다. 아웃사이더 되기가 너무 쉬운 그런 환경들. 원한다면 언제고 변신할 수 있는 허술한 인간관계들.
폴 오스터는 개인의 세계에 빠져버린 작가들, 학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불우한 천재들에 관한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지. 그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수고끝에 남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리는" 파경뿐임을 경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