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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l 04. 2021

비루한 인간들

지도와 영토


세상을 이해하려고, 이해하려고, 온 생애를 소진한 예술가의 삶이 측은함으로 다가온다. 측은함이라니?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 "지도와 영토"는 독자를 생각의 웅덩이에 빠뜨리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이속에서 빠져나갈수 없다. 작가도 풀지 못한 숙제를 한갓 독자가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저, 그런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것으로 일단, 이 소굴에서 벗어나는 것도 한 방법일 듯싶다.


제드 마르탱의 그림작업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미술의 양대산맥을 의미하는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머지 한 사람의 표정을 완성하느라 긴 시간을 소모한다. 그 한사람인 제프 쿤스는 이렇게 소개된다.

 "전문 영업자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교활함과 고행자의 희열 사이에 존재하는 극복 불가능한 모순"을 지닌 사람이다. 제프 쿤스도 실제 화가가 모델일수도 있다. 혹은 소설속의 주인공 제드의 자화상일수도 있고.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다. 화가를 따라가는 독자들도 미완성 그림앞에서 안절부절한다. 


작가 미셸 우엘벡이 작중인물로, 꽤 사실적으로 등장하며, 많은 사람들(문학, 미술, 미디어, 출판 등등)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이점은 흥미로왔던 반면, 낯설음을 주었고, 소설에 거리가 생겼다. 왜냐하면,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을 한명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문열, 황석영, 신경숙, 공지영 등 한국의 작가들의 이름이 거론됐다면, 소설속 비아냥이든지, 경탄이든지 나름 내것으로 정리하면서 책과 호흡을 같이 할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각주로 달아놓은 그 이상의 정보를 알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니, 그건 그나마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프랑스식 이름일뿐이었다. 개중에 또 많은 인물들은 여러번의 설명으로 그의 성격을 짐작하지만, 여전히 살갑게 다가오진 않는다. 외국소설은 읽지 말아야지,가 단순한 첫번째 작정이 되기도 하였다. 


책을 읽고나서, 몇사람의 서평을 찾아읽었다. 어떤 사람은 만약에 한국에서 이렇게 실명으로 작가가 소설속에서 난도질했으면, "명예훼손" 고소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라 했다. 소설은 현실처럼, 허구처럼 그렇게 많은 살아있는 이들을 등장시키면서 이어진다.


소설의 큰 축은 화가 제드 마르탱과 미셸 우엘벡의 우정이다. 
독자들은 우엘벡이 이 소설의 작가이며, 자신을 3인층으로 그리고 있는 면에 주목하게 된다. 적어도 나같은 독자에게는 이 책을 읽음으로서 그 많은 실존 등장인물중 우엘벡만이 피부적으로 "아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제드의 아버지의 입을 통해 "요양원에 작은 도서실이 있어서 그이의 소설 두권을 읽었다. 꽤 괜찮은 작가 같더구나. 읽기 나쁘지 않았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해."라고 언급한다. 또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유명한 작가"라는 말도. 웬 자화자찬인가 싶지만, 마르탱이 이 작가의 발문을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주기 위해 도입된 부분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또한 일반적인 사회의 평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소설은 참으로 느릿느릿 진행되는 듯하다. 제드의 완성되지 않는 미술작품 앞, 의식을 갖춘 제드와 그의 아버지의 맥빠진 크리스마스 디너, 별 재미없는 일상을 사는 제드 때문인지 자꾸 발걸음이 멈춰진다. 그래도 제드는 시간을 보내면서 작품을 생산한다.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전 그의 첫번째 작품은 사진이었다. 풍경이나, 인물 그런 사진이 아니라, 지도를 찍는 사진.. 미슐랭이라는 지도에 혹한 제드는 프랑스 곳곳을 그려놓은 지도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그 지도를 사진으로 담는다. 수천장 이상의 사진을. 미슐랭 지도 회사에서 일하는 올가의 눈에 띄여 첫 작품전시회를 여는데, 이 전시회가 성공한다. 


제드는 미슐랭 지도 전시회후,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올가"를 떠나보내고, 그의 사진이력을 접는다. 더이상 할수 없었다. 그리고 방황하다가 그의 두번째 작품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것이 직업시리즈이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일을 가진 사람들"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스티브잡스도 빌 게이츠도 등장한다. 그가 내내 그리려고 했던 미술가들의 작품은 결국 찢어버렸고, 대신 마지막 작품으로 미셸 우엘벡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다. 그의 그림 그리기 방법은 실제 모델의 여러 모습을 사진을 찍고, 주변도 찍어 그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배경은 비사실주의적으로 구성되지만, 모델은 그들을 나타낼 수 있는 강력한 표정을 뽑아냈다. 제드는 평생 건축가로 일하다 은퇴하는 자신의 아버지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제드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각별함이 그다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과 예술에 대해서 제드와 우엘벡은 통하는 데가 있다.


"사람들이 초상화가에게 모델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무언가를, 즉 모델의 개성을 강조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로는 저도 그러고 있고요.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흔히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인간들은 서로 닮은 것 같아요. 특히 얼굴의 평평한 부분이나 위턱을 그릴 때면 똑같은 퍼즐을 되풀이해서 맞추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인간들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인간을 관찰한 화가 제드는 인간이 별스럽지 않다고 규정한다.


우엘벡은 "사실 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연대감이 아주 희박하오.... 인간에 대한 소속감이 하루하루 조금씩 사그라진다고 할까" 말하기도 한다. 그의 인간관계와 그가 묘사하는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비아냥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발언이다. 그가 약간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몇가지 공산품들. 그러나 공산품의 생명은 한계가 있다. 인간도 이런 공산품을 닮았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 역시 문화상품이요.. 문화상품. 우리도 곧 한물간 시대가 될 거요. 공산품들과 똑같은 절차를 거쳐서 말이오. 하지만 우리에겐 딱히 이렇다 할 기술발전이나 기능 개선이 적용되진 않을 거요.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을 요구할 뿐이지."(205쪽)  예술가들의 운명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우엘벡이 제드와 대화를 나눌땐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뤘다. 물론 예술가도 인간의 한 부류라는 것을 잊지 말자.


제드는 7년간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박한 직업 시리즈" 그림들을 완성한다. 그에게 떡밥을 뿌려놓은 화랑주인 프란츠는 예술적, 상업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제드는 때가 되자, 그에게 전시회를 맡긴다. "인간은 몇년이고 혼자 일할 수 있고, 사실 그것이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동안 작업한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여야 할 필요를 느끼는 순간은 늘 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작품의 존재,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라고 말하면서(149쪽).


그림은 그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다준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무리없이 받아들인다. 그만큼 제드의 창작과정에 대해 공감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개월간, 고장난 온수기의 소음을 들으면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제드를 독자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발표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몇년이고 작품에만 매여있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어떤 경로를 거쳐 세상에 발표된다. 그건 이제 작가의 손을 떠난 것이며, 시장의 논리에 스며들어가게 된다. 전문 미술홍보가가 나오고 화랑주인이 나오고, 작품의 완성도와 희귀성, 작가에 대한 각계의 반응과 소비자들이 만나 가치가 있을때 일반인은 만져보지도 못할 높은 작품가가 그림에 매겨진다. 제드는 두번째 전시회에서 백만장자가 된다.


그는 미셸 우엘벡이 발문을 써준 댓가로 그의 초상화를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니, 그림들은 경매로 팔려 그 가치가 엄청나게 솟아있다. 그는 미련없이 그 그림을 우엘벡에게 배달해준다. 그때 마침 우엘벡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제드는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고요하고 기쁨이 없는 상태, 요컨대 무감각한 중립상태"를 느낀다."(324쪽) 이것이 2부의 마지막 문장이다. 독자는 제드의 바닥없는 고독에 마음이 함께 확 가라앉는다.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납덩이같은 분위기... 그런데 이게 3부를 열면서 확 무너진다.


3부에 들어서면서 소설은 격정적으로, 빠르게, 몰아쳐간다. 음악을 잘 아는 이라면, 이 지점에서 호흡이 가빠질 것 같은 빠른 금속음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한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그동안 소설에서는 스토리 라인이란게 딱히 없었다. 정말 지루할 정도였다. 겨우 미셸 우엘벡과의 끊어질듯 이어지는 두 고독한 예술가의 만남이 그 명백을 이어왔을까? 그런데, 3부의 첫 페이지는 살해당해 썩어서 파리가 들끓는 우엘벡이 등장한다. 그것도 더할수 없이 처참한 방법으로. 작가는 자신을 죽인 것이다. 하, 이 작가 왜 이럴까, 충격이다. 작가는 죽었지만, 소설은 계속된다.


내 머리에 처음으로 떠오른 범인이 제드 마르탱이었다. 왜냐하면 미셸 우엘벡의 인간관계가 그외엔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제3의 범인이 아니라면, 제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개연성을 떠나서, 이렇게 요상한 추리를 해놓고나니, 소설이 더욱 긴장된다.


자슬랭이라는 경찰이 나오고 그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된다. 결론부터 말하자. 우엘벡을 살해한 사람은 제드 마르탱이 그려준 고가품이 된 "우엘벡 초상화"를 훔치기 위해 성형외과 의사가 벌인 짓이었다. 제드는 우엘벡을 죽인 범인을 잡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를 살인범으로 잠시라도 생각했던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드란 인물에 몰입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제드가 우정의 표시로 그려준 그림은 결국 우엘벡의 죽음을 불렀다. 이럴때 아이러니라고 하나. 책은 제드의 죄책감같은 부분에 대한 묘사가 없다. 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제드는 "그렇잖아도 비루한 세상에 그런 살인자가 있어 더 비루해졌다"고 외친다.


3부를 읽으며, 추리소설이 갖는 매력에 다시한번 빠져들었다. 흐름이 없는 호숫물 같았던 소설이 어느새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폭포물줄기로 변해있는 느낌이었달까? 미셸 우엘벡은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자신을 죽였다. 소설가니까 자신을 죽일수도 있는가 보다. 


 "천형"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그들은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천형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제드 마르탱과, 미셸 우엘벡을 지칭할 수 있겠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종종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사람, 삶의 비의를 밝혀내는 사람, 미의 창조자"들로 경의를 받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는 개나 물어가 버리라고 우엘벡은 말한다. 일상이 없고, 모든 삶을 그에 바친, 혹은 그에 끌려간 "인간적으로 동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의 예술가를 그렸다. 너무 심하다 할 정도의. "천형"이란 멋스런 단어가 아니다. 죽음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아, 섬뜩하다.


제드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우엘벡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너무 큰 고통없이, 중병에 걸리는 일도 거동이 불편해지는 일도 없이 끝나는 것뿐이요."(314)라고 말했다. 이런 기대마저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그가 예술가였으며, 인간이었으므로. 어쩌면 인간 모두가 그런 말로를 갖게 된다고, 편차는 있겠지만 그런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기대할 것을 한톨한점도 남겨놓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쓰디쓴 "부정"이다. 


우엘벡은 "늘 메모하고 문장들을 늘어놓아볼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려면 이 모든 것이 촘촘해지고 논박의 여지가 없게 될 때까지, 필연이라는 진정한 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소설은 절대 소설가 마음대로 쓸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작가가 할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기 그렇게 존재하며 무기력한 번민속에서 책이 저절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뿐(305쪽)"이라고 소설작업을 설명했다. 삶도 그렇게 무기력했다. 수사관들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이렇게 비루하게 살다간 사람은 난생 처음 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상적인 즐거움을 완전히 뺀, 단물빠진 "껌"같은 인생같았던 것일까. 미셸 우엘벡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소설은 그저 회색으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우엘벡의 파격적인 소설작법에 감탄을 삼킨다. 


소설은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제드는 조부모의 집으로 간다. 번 돈으로 그는 집 주위의 땅을 사서, 울타리를 치고 혼자만의 삶을 산다. 거의 30여년을 그랬던가 보다. 소설은 제드의 60살 너머의 삶까지 보여준다. 때는 2040년쯤 되겠다. 그때 프랑스 시골의 달라진점..말하자면 외국인과 이방인에 배타적이던 사람들이 친화적으로 변한점, 출생률이 높아진 점, 러시아, 한국, 중국 등 그들에 대한 조금 더 열린 마음 등등이 짧게 스케치된다. 그는 미래는 조금 더 긍정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현재의 모순을 그런 식으로 좀 풀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저 스케치에 그쳐서 그의 의도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가 죽을 때쯤, 그가 그동안 작업한 비디오그램이 공개된다. 그 비디오 그램은 제드가 창작의 욕구가 일어날때 촬영해서 편집한 것들이다. 거의 3천 작품이 모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제드의 3번째 작품들이다.


그는 "아트 프레스"의 젊은 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소.. 단지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오" 라고 말한다. "순간의 충동에 의해서 창작" 한 그 작품들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평단들은 "식물의 관점을 표현하려 했던 가장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들은 "공산품들이 켜켜이 층을 이룬 식물들 속으로 점차 잠겨 들어가며 그속에 빠져버린 듯 보이는, 길고 몽환적인 컷"(505쪽)들이었다. 그는 식물의 승리를 주장했다. 인간들도 식물들 속에 녹아내려가는 듯한 모습의 영상을 담았다. 오랜 시간 촬영과, 편집등의 기술적 방법, 자연에 마모된 사진등을 이용해 그런 작품을 담아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제드와 아버지의 관계이다. 제드의 아버지는 직업으로만 남은 사내가 되었다. 그도 예술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는데 사회의 요구에 순응했다. 그리하여 부를 이룰수 있었고 큰 집을 샀지만, 아내는 자살했고, 자신은 사업에 바빠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결국 늙고 병들어, 안락사를 하게 된다. 제드는 그의 아버지, 미셸 우엘벡이 죽은후 누구와도 관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독한 영토에서 사진을 찍고, 작품을 만들며 생존했을 뿐이다.


현재 프랑스 사회의 단면이 조금 더 들여다보인다. 가족의 붕괴, 사회적인 교류의 파행, 커뮤니티가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등등.. 오로지 돈으로만 굴러가는 자본주의는 결국 비극을 맞는다는 걸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하나 그의 여자친구였던 올가. 그녀는 "프랑스에서 다섯 손안에 드는 미인"으로 나온다. 러시아 여인이고.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도 주목할만하다. 미인을 "인간답게" 그린 최초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건 드라마건, 미인을 등장시킨 것들중에 이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쨋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소설의 지지고 볶는 스토리가 없어서, 내심 조금 다른 종류의 독후감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역시 소설에 완전 기대서 쓰는 그런 리뷰가 되고 말았다.


미셸 우엘벡은 문제작가라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서 이 작품 자체가 문제작으로 보이지만, 몇편 읽은 서평을 미루어볼때 그의 경향이 많이 완화된 것이라 한다. 내가 프랑스인이었다면, 소감은 좀더 푸짐해졌을 것이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아니면, 적어도 프랑스 문학이나 사회에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작가가 말한 것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본 것 같다. 특별히 문학예술인 비평같은 분야와, 공산품의 설명등에선 할말이 없다. 간신히 그의 호흡을 따라갈 염두를 했던 것은 사진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렌즈와, 초점, 장노출 등등의 사진용어들이었다. 그것도 따라가는데 힘이 부쳤다. 그럼에도 할말이 많다고 느꼈다. 작품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말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첫 전시회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가 주제였는데, 이 소설의 제목을 이에서 추론해볼수 있다. 사실 지도와 영토는 무엇이냐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영토를 축약해서 그려놓은 것이 지도이다. 제드는 미슐랭 지도에서 영토보다 더 아름다운 "지도영토"에 끌리게 된다.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그에 동의한다. 지도는 말하자면, 예술이고, 영토는 세상이다. 인간이 구성하고 그리고, 축약해놓은 지도가 "더욱 흥미로운 것"에 예술의 비의가 숨어있는 것 같다.


예술이 천형이긴 하지만, 제드의 마지막 삶의 회고에서 "그렇게 나쁜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쓸모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어쨋든 달려야 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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