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패밀리
"해피 패밀리"는 제목부터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첫째로 "해피 패밀리"라는 직설적인 낱말조합에서 "해피"보다는 "언해피"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판단이 자동으로 머리속에 스며들어 온다는 데 있고, 두번째는 해피 패밀리를 제목으로 쓰기에는 그 발음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happy family와 해피 패밀리는, 완전히 다른 발음으로 읽힌다. 이민살이 이력이 쌓이면서 내가 구별하는 f 발음과 p 발음을 염두에 둘때 이 제목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특히나 작가 고종석씨는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소문"이니 그가 해피 패밀리를 제목어로 선택한 데에는 제목에서부터 현실과의 괴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행복"해야할 가족들이 "행복하지 못한 당위성"에 대한 이야기가 고종석씨의 장편소설 해피 해밀리에 담겨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막연히 이름 석자를 알고있던 고종석씨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한때 절필선언을 했으며, 시대의 문장가, 언어학자,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 지금은 트위터로 세상과 소통하는 전라도 출신의 뚝심있는 지식인이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을 통하지 않고도 이 작품만으로도 그를 알아챌 것같은 내용들이 많았다.
주인공 한민형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술을 좋아하는지, 글쓰기에 대한 그의 고집같은 것들이다. 그는 글과 사람이 달라서 언제나 실망했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글쓰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글"이 너무 우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글은 좋아하지만, 사람은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글을 버릴 수는 없다. 사람은 버릴지라도. 책은 그에게 아편같은 것이 되어있다.
글쓴이와 글의 다름을 집어내는 데 그는 예리하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이 장면에서 먼 옛날이 떠올랐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취직했던 문학잡지사. 그 잡지사의 주간은 유명한 소설가였다. 그는 잡지를 만들고 나면, 절간으로 피신해 자신의 글을 썼다. 그 기간이 한2주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치열하게 글쓰기에 열중한 그는 문학지망생들에게 우러름을 받을만하다. 그런데 나는 그를 그렇게 좋게 봐줄수가 없었다. 직장 상사로서의 그는 그렇게 존경스럽지 않았다. 문학사이었기에 지면이 필요한 글쟁이들이 자주 사무실에 들른다. 그는 그들앞에서 주간으로서 자주 거드름을 피웠다.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원고를 떨구고 가는 그들을 비루하게 만드는 그의 위풍당당함.
그중에 천상병 시인도 있었다. 그는 정말 볼품없었고, 왜소했고, 주간앞에서는 고양이앞의 쥐처럼 맥을 못췄다. 나는 글을 앞에 두고 권력의 자세로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그가 겁나도록 싫었다.
몇십년전의 일을 왜 떠올릴까? 그가 소설가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때 그야말로 글과 사람이 다른 1인이었다. 글은 자기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료와, 기술과, 문장력이 있으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그때의 교훈이 있어서였는지, 나는 나름 "글과 같은 사람" "사람과 같은 글"을 쓰는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같다.
고종석이 말하는 "글쓰는 사람"은 나같은 풋내기를 의미하지는 않을것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도 같다. 오죽하면 자학적인 글에서도 그 자학을 통해 자신을 미화한다고 꼬집어 성토할까? 그런 자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중에 자신도 끼어넣었을 것이다.
사실 가끔은 나도 그런 장치를 이용하긴 한다. 내 열등감을 은근슬쩍 끼어넣어, 그 열등감을 폭로하는 정직성으로 나의 "미화"를 시도하는 일등이다. 이런 것들도 고종석의 눈에 가차없이 걸리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절필 선언까지도 했다 싶다. 그후에 다시 펜을 들기는 하지만.
언어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하자.
잘 알지 못했던 단어들이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을 냈다. 알지 못하기에 더욱 호감이 갔고, 적재적소에 그 단어들을 나열해서 그것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 문장들을 끄집어내자.
병원 대기실에서는 시간이 모지락스럽게도 느릿느릿 흘러간다.
-소설의 두번째 문장이다. 독자들이 책을 고를때 첫페이지에서 충격 비슷한 것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다. 소설을 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서두 부문의 문장들은 큰 책임감이 있다. 병원대기실에서의 시간을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특별히 모지락스럽다는 말에 잠깐 시선이 멈춘다. 모질다, 모지다 등에서 파생된 언어로 보인다. 여기에서 모지락스럽게는 매정한 뜻으로 쓰인 것같다. 병원대기실에서의 기다림, 두려움, 초조, 긴장 등의 감정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치과에서 다루는 부위가 머리의 일부라는 사실이 더러 공포의 밑감이 되기도 한다
-밑감은 주로 재단에 사용될만한 용어이다. 원단밑에 들어가는 밑감의 의미.. 그런데 공포의 밑감이라 해서, 전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낱말을 보기좋게 조합해내었다. 원인이라고 해석하면 될까?
주로 원색을 사용한 흩진 형상의 유화들이다
-"흩진"이란 단어는 흩어진을 짧게 줄였다고 봐야하나? 무엇인가가 원색으로 흩뿌려진 그림이 상상된다. 흩뿌려진 것을, 흩진으로 모아놓으니, 그림이 조금 더 단단해 보인다.
출퇴근 관념이 없는 허릅숭이 직장인이었으니
- 허릅숭이란 말은 사전에 있었다. 일을 진실하고 미덥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란다. 본인을 허릅숭이 직장인이라 표현했다. 이것이 산문이었다면, 자학으로 자신을 미화한 그 예문이 되는 셈?
속된 말로 '갈갈말말' 갈사람은 가고 말사람은 말자는 주의다.
-속되다고 말했는데, 갈갈말말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어쩌면 작가와 주변인들이 주로 쓰는 낱말? 아니면 한국사람들이, 어쨋든 이것도 메모해보았다.
텍스트의 질이 아니라 광고효과로 판매를 늘리는 요즘 풍조가 썩 맞갖지는 않다.
-맞갖다는 딱 알맞다는 뜻이란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을때 맞갖지는 않다를, 마땅하지는 않다로 읽었다. 크게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민희가 들을 때, 민희가 역접으로만 맞장구를 친다고 하자.
-역접이란 뜻은 앞에서 서술된 사실과 반대되거나 그와 일치하지 않는 사태가 뒤의 글에서 성립함을 나타내는 양식이란다. 그러나, 하지만 등의 접속사가 나오게 된다.
시부모님이 참척을 당하기 전까진, 그에 대한 감정이 또렷하지 않았다...
-참척은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말한다. 참척이란 단어도 현대어에서는 그리 자주 쓰이는 것 같지 않다. 민희를 잃은 시부모님에 대한 서현주의 글에 나타나고 있다.
남편은 그저 내 가까운 친구의 푸네기였다.
-푸네기는 가까운 제살붙이를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친구의 푸네기였던 한민형이 자신의 남편이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꼭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꼭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숨탄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숨탄것들이란 뜻은 몰라도, 문장을 통하여 짐작해볼수는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 숨쉬는 것들을 통칭하겠다는 짐작이 든다. 숨탄것은 숨을 받은 것이라는 뜻으로 동물을 이르는 말이란다. 이것도 사전에 나와있다.
줄넘기를 할때면, 그 횟수가 반드시 피보나치수열의 한 숫자여야 했다.
- 정말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단어가 있었다면 피보나치수열이었다. 나는 피보나, 치수열 이렇게도 읽어보았고, 피보나치수열, 이렇게도 읽었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수열"에 대한 이야긴줄 알수 있었을텐데. 강박증에 관한 대목에서 나온다. 피보나치 수열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수의 열을 뜻하는 데, 1,1,2,3,5,8,15 와 같이 최초의 두항이 1,1이고 그 뒤는 앞서는 두 항의 합이 그 다음 항의 수가 되는 수열을 뜻한단다. 수학을 하는 사람들은 잘 알것이다. 어쩌면 나도 들어봤는지도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내 두뇌에는 없는 단어여서 놀랐다.
위와 같이 이 책은 새로운 단어들이 곳곳에 박혀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고종석을 언어학자라고 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이 단어가 박혀있는 문장들은 단어 때문인지, 그 자체로 비범하게 보였다.
소설에서 스토리는 문장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소설에선 일단 문장, 낱말에 발목을 잡혔으니, 그것을 이 소설의 특징이라 말하자. 그러나 스토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 소설안으로 들어가보자.
소설은 한민형이라는 출판사 편집장을 중심으로 그의 부모, 누이들, 아내, 장모, 딸, 후배가 서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서로 가족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제는 물론 가족이다. 가족.. 식구는 누구냐는 것이다.
한민형을 중심으로 가족이란 개념을 살피자.
그는 친아버지의 회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한다. 간단하게 보면 아버지와는 직장 상사와 부하 관계처럼 보인다. 어머니와는 거의 관계를 끊고 산다. "천박한 어머니"를 싫어한다. 작은 누이중 영미는 그가 거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한다. 입양되어서 집안의 식모처럼 자라난 그녀에게, 대학도 보내게 부모에게 저항도 해주고, 그녀를 끝까지 돕는다. 막내 동생 민주에게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가족애"를 보인다.
그리고 장모님에게는 자신의 친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살갑게 대우해준다. 큰누이 민희와는 금지된 사랑을 한다. 소설에서는 사랑의 세세한 과정은 나오지않아, 이것이 진짜 남녀간의 사랑인지, 호기심인지 구별할 길이 애매하지만, 결과적으로 큰누이는 민형의 아이를 낳고 자살한다. 이 사고가 이 소설을 음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이다. 그리고 큰누이의 단짝 친구였던 아내가 된 서현주, 그는 그녀를 분에 넘치는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한다. 자신의 아이면서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딸 지현이.... 한민형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영미에게는 친오빠 이상의 애정을 보이고, 신경강박증을 앓고 있는 장모에게도 또한 그럴 수 없이 온유하다. 사랑은 "자신이 애닯아할 무엇이 있는 사람들"에게 간다. 그리고 "느낌"이 통하는 이들과도 가족간의 애정을 나눈다. 가족이라 해서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의 애정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이기도 하다. 다만, 가족의 이름에서 그런 것들을 감히 공론화시킬 수 없다는 점은 있지만.
가족의 숫자가 많은 나도 한민형을 조금 이해할 수는 있다. 가족중에 친한 누군가가 있고, 소원한 누구도 있다.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도 사랑의 모양이 시시때때로 바뀐다.
작가는 민형의 딸 지현의 질문을 통해 식구의 의미를 넓히기도 한다. 가령,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식으로 그것이 인간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동물까지 범위를 넓힌다. 범인류애적이고, 범자연적이다. 그러나 그게 세상에 통할 것 같진 않다. 작가가 남매를 근친상간시키고, 입양한 동생을 친 동생 이상으로 사랑해도, 인간은 여간해선 관습을 깨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했던 누이는 죽어야 했고, 그는 말술로 자기혐오를 때때로 잊어야 했던 것이니까.
아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남남이 만나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그 관계가 불완전함을 내포하고 있다. 아주 당연한 발견이지만, 가족으로 엮어질때의 그 진실됨, 서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그 가족의 튼튼함이 형성되어 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이 불행해진 이유중 하나는 엄마의 입양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몰인정, 그리고 남편도 모르는 불륜의 시간을 지냈던 것, 아들과 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모질게 굴었던 것등이 중첩되어서 깊어졌다.
이 소설은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변명이 치사하게 느껴지는 건 한민형의 어머니 민경화 여사로 보인다. 주인공이 용서하지 못하는 그녀이기 때문에 독자들도 그녀를 약간은 기운 시선으로 본다. 민경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땐, 그 대상의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건 속물들의 사랑이라고? 그렇지 않다. 신분이나 계급만이 조건인 것은 아니다, 인격이나 취향도 조건이다. 앞의 조건을 중시하는 것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저지른 일은 똑같지만 그 결과의 차이는 남편의 정서에 판단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나는 민주를 낳으면서 그 아이의 혈액형부터 확인했다."
대상의 조건을 사랑해서 열정없이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중간에는 불륜도 맺었다. 막내딸은 사실 남편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은 친구의 딸을 입양, 그애를 키운다고 하면서 하녀처럼 부리기도 한다. 이런 비뚤어진 마음으로 가정을 시작했고,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불행한 가족이 되었다는 시나리오도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반성과 절제와 자기학대가 심해서, 누구에게 화살을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오로지 한민형의 엄마에게 모든 덤테기를 씌우는 것은 어떨까? 그것에다 보탠다면, 크게 상관하지 않고 아내를 방관한 그의 남편 한진규도 공범이 될수도 있다. 끝이 없다. 가족들이 서로에게 화살을 돌려대면서 책임전가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글쓰기가 되어간다.
이 소설에서 밝고 경쾌한 몇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한민주, 서현주, 이정석이 그들이다. 타고난 긍정적인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경박하지도 않은. 그런 사람들이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보인다.
어쩌면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아물 것 같기도 하다. 한민희가 자신의 아이에게 흠결없는 출발을 주기 위하여, 자신이란 존재를 없앤 것은 그야말로 모성애적 사랑이기도 했다. 죽음으로 딸애의 유산을 남긴..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선 비판적이었지만, 책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배경으로 나와서 좋았다. 너무나 많은 글을 읽고 또 그 글을 쓴 이를 만나본 고종석 작가의 실망을 대신 먼발치로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도 글을 버리지는 못했다. 2013년 절필선언 이후 다시 "생계"를 위해 펜을 들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트위터 글이 때로는 논란을 낳기도 했고. 고종석 작가는 글을 떼어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결국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같다.
글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고뇌를 다시금 들여다보게된다. 자주 말하지만 그런 고통에 빠지고 싶지 않다. 요즘엔 "글쓰기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어서 즐겁다. 글과 씨름하느라, 다른 것들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작가가 글에 대한 압박감을 좀 벗어버리고 글을 즐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