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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n 27. 2020

지축을 뒤흔드는 전쟁소설

문학의 위대한 업적... 이창래  "생존자"

8페이지에서 48페이지에 이르는 생존자 첫 장은, 거의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나를 에워싸고, 그들의 치졸함과 추함과 악함과 상함과 파렴치함, 불쌍함, 폭력성 등 그 모든 전쟁의 상흔을 드러내며, 함께 이 고통을 나눠지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47페이지까지 쉴 시간을 주지 않고 달려와선 마침내 나타난 흰 여백 앞에서 "아, 이럴 수가!!" 절망적 언어가 입밖에 나왔다.


어떤 영화, 어떤 미디어가 이런 것을 줄 수 있을까? 문학이 해냈다. 생존자의 작가 이창래는 1950년의 이야기를 오늘에 살려놓았다. 영문판은 2010년에 나왔으며, 한국판은 2013년도에 발간되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분단된 조국은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전쟁이 왜 안되는 것인지, 책을 통해 한번 더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대강 어떤 책인지 1장만 집중해 보기로 하자.


1장도 한 편의 완결된 소설처럼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 주인공 준의 언니 희성의 이야기에는 "전쟁"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처절히 보여준다.


논리는 어느 곳으로 멀리 이민을 가버렸다. 다른 선택은 없다. 구겨지고, 찢기다가, 자신도 누군가를 넘어뜨리고 폭력을 가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시로 자리바꿈을 한다.


희성은 이제 14살 소녀다. 희성의 엄마는 그녀를 사내아이처럼 꾸며서 피난길을 데리고 다닌다. 그러다가 제트기 잔해 속에서 양식을 발견한다. 그것을 딸의 가슴에 붕대로 묶어 보관한다. 그 딸이 군인들을 피해 축구공을 차는 동생들 곁으로 갔다. 헛발길질을 하다가 군인들에게 여자아이임을 들키고, 결국 온몸을 수색당한다. 양식도 뺏기고, 군인들은 그 짓을 위해 그 아이를 트럭 뒷칸에 태운다. 희성의 어머니는 딸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트럭 뒤꽁무니에 매달린다. 간신히 트럭에 올라갔을 때 제트기가 나타나 군인 트럭을 폭파한다. 차량 안에 있던 화약과 더불어 그들은 시체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엄마와 언니가 그렇게 죽어가는 걸 11살 준과 그녀의 두동생이 지켜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전쟁터밖에 없다. 말이 안 되는 상황, 비극에 비극, 처참함에 처참함을 넘어서 있다. 작가는 38페이지에서 "그들의 울음소리는 산채로 살가죽을 벗기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웠다"라고 적고 있다.


상식과 도덕은 없어지고, 죽지 않기 위해 남의 것을 도적질 하고, 약간의 건어물을 얻기 위해 남자에게 몸을 주는 여인네도 나타난다. 1장의 마지막 장면은 알뜰살뜰 동생들을 돌보던 준은 동생들이 기차에서 떨어져 다리가 잘려나갔고, 어린 동생을 안고 뛰다가 죽어가는 동생을 길에 내려놓고, 달리는 기차를 집어타는 장면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은 일들이 전쟁터에서 일어난다.


이 책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그렸다.


주인공 몇 사람을 추적해보자.


: 그녀는 전쟁에서 혼자 살아남아 뉴욕에서 사업으로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단 한 명의 피붙이인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살아간다. 그녀는 암 선고를 받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로 아들을 찾아 유럽여행을 계획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 살아온" 세월, 그녀에겐 죽어가는 자신의 육신만 남아있다.


헥터: 미군 참전용사다. 아버지를 죽게 한 죄책감으로 한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시체 처리반으로 일한다. 육체적으론 강인하지만 정신적으론 한없이 여리고 섬세하다. 고아원에서 온몸을 바쳐 일만 한다. 목사의 아내 실비를 사랑하였다. 그는 평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며 사는 삶을 택한다.


실비: 선교사의 딸이다. 전쟁지역을 찾아다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워졌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잔학이 극에 달 했을 때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도 일본군인들의 성적인 대상이 될뻔했다. 작가는 1장에서 준의 가족이 당한 것을 그려낸 것처럼, 실비와 선교사 가족들이 일본군 장교에서 당하는 광경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느낄 수치감과 두려움과 공포가 그대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정도로 그 묘사는 탁월했다. 실비는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헥터의 사랑을 받지만, 결국 고아들을 구하다 화재사건으로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진정한 박애를 펼치는 천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적으론 마약에 의존하고, 헥터와의 육체적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몸은 분명히 어른인데 정신이나 마음은 그에 걸맞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은 예리하게 알아차렸을 것이다”(557)라고 소설 속에선 그녀를 설명하기도 한다.


실비 역시 전쟁의 상처 때문에 정신이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감”없는 “감정”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 자신의 존재의 성장에 대해서는 어떤 “욕망”도 없는 사람이라 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그녀를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생존자"라는 책은 세 인물을 골고루 비쳐주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잊고 새 생활을 하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주지 시킨다.


661페이지에 이르는 장대한 장편소설인 이 책은 우선 문장도 길고 한 페이지 전체가 한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도 많다. 그야말로 흰 여백은 한 군데도 없다.  양껏 "글자"를 흡입하고 싶은 "문자 중독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만하다. 대화로 이뤄진 부분도 적고, 오로지 글자에 의존해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책을 다 정리할 순 없다. 여러분께서 읽어보기 바란다. 다만, 내게 들어왔던 부분을 중심으로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죽음에 대하여


이 책은 박상륭 소설 "죽음에 관한 한 연구"를 생각나게 했다. 젊은 시절 그 책을 읽고 느꼈던 충격이 다시 살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책을 다시 읽을 자신은 없다. 너무 관념적이어서 지금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의 내용을 다 꿰뚫을 것 같지도 않다. 죽음에 관해서 다뤘다는 부분에서 그 책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해여 관념적이지 않고 현실적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모두가 최악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 곁에는 "결코 죽지 않는" 헥터가 있다. 어쩌면 헥터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작가가 어떤 영적인 부분을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를 통해  정사신도 많이 넣지만, 그것도 어떤 "해갈"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에게 베푸는. 헥터의 존재는 이 소설을 이끄는 어떤 "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그들의 죽음을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드는 어떤 존재로 그렸다. 이미 죽은 시체에게까지 경의를 표하고, 암으로 빼빼 말라죽어가는 준을 마지막까지 돌봐준 이도 그다.


“헥터는 또 다른 전쟁이 터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처벌하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전쟁을 갈구했다.”(97)


죽음에 준비된 헥터만 죽음은 비켜갔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죽임이 여러 각도에서 찾아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헥터는 죽는 자 옆에서 그들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죽음의 길잡이 같은 역할이다. 전쟁에서는 그런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도 다른 사람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그는 “어느 정도 사랑이 있는 평범한 안식처를 얻는 게 그의 꿈이었다”(129)고 말한다. 그것을 거의 쟁취할 뻔했다. 소설이라서 그럴까? 바로 그 장면에서 사건은 다시 절망적으로 회귀한다. 그런 운명은 헥터의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소설에서 조금 실망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장면이기도 했다. 그가 마침내 평범한 행복을 얻으려는 그때, 자동차 사고로 그의 여자 친구가 죽는. 그리고 준의 죽음의 여행에 그가 참여하게 되는. 그 부분이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전쟁터가 아닌 뉴저지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어쩌면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적인 전쟁들은 이런 “사건, 사고”들일 수가 있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그걸 보여주려 했다면, 그렇게 양해를 해주기로 하자.


준의 아들 니콜라스


고등학교까지 잘 마친 준의 아들 니콜라스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이지만, 결국 그의 실존은 확인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다. 겨우 19살에 아빠의 흔적을 찾아 유럽으로 떠난다. 방랑의 시간이 오래되어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죽임을 당한다. 준은 그것을 믿지 않고, 죽기 전에 아들을 봐야겠다는 열망뿐이다. 서류상 남편이 되어주었던 헥터의 아들이기도 하다. 둘은 미국에 와서 바로 헤어져서 서로를 찾지 않았다. 준의 아들은 그의 어미를 닮아선지 도둑질을 잘했다. 준이 그 애를 혼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자신도 훔치고 살았던 그 이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방치해서 키웠던 것에 대한 반성을 아들이 떠나고 나서 한다. 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적이었던 소년은 "이상한 엄마" 밑에서 자라나,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고독하게 죽어갔다.


전쟁 참여자들


흔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의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전쟁과 관계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비중 있게 다뤘다. 이 전쟁은 한국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참전용사들의 죽음도 가져왔다. 미군은 5만 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말해진다.  전쟁고아들을 돌보다 죽은 선교사들도 있다. 전쟁에서 간과하기 쉬운 그들을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 혹은 남의 나라 전쟁터에 와서 돕는 그들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신은 그런 사람들을 따로 모아놓았다가 전쟁터로 보내는가 보다. 인간적으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희생한다. 어떤 명분, 실리를 쫓는 것이 아니다. 고아들을 정말로 사랑했던 태너 부부.. 그들 부부의 고뇌까지 정밀히 보여주니, 사랑이 더욱 서글프고 귀중하게 느껴진다.


1930년대까지 역사는 파헤쳐진다.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들이 나오고, 그런 지역을 돌며 부상자, 전쟁고아자들을 돌보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도 편안함을 찾는 사람들일진대, 그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 전쟁에서 영문을 모르고 죽어가는 자, 고문을 행하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그 안에서도 삶을 일궈내려고 애쓰는 박애주의자들, 그들 모두가 섞여있다.


이름들


"생존자"에 나오는 외국인 이름들에 주목하게 된다. 참으로 흔하지 않은 이름들이다.  헥터를 시작으로, 젤린코, 모라, 클라인스, 니콜라스,  스미티즈, 코놀리, 빅 잭스, 슬로안, 틱, 에임즈, 퀘니그, 도라, 실비 등등. 소설에 잠깐씩 등장하는 이들조차 낯선 이름으로 나온다. 왜 일까? 미국 사회의 다양함, 복잡함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름이 줄 수 있는 단순한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방법으로. 자꾸 걸려 넘어지게 해서, 한 번씩 더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에 나오는 한국인들


우선 준은 어렸을 때는 언제나 화가 나있고, 경직되어 있는 아이, 고아원에 불을 지를 정도로 과격했던 아이였고, 미국에 와서는 나름대로 성공한 여자가 되지만, 아이에게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해 아이를 멀리 떠나보내는 최악의 부모가 된다. 아빠를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진정으로 아빠를 보여주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곁에서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죽으면서 친절을 나눠주는 것을 보면, 그녀의 천성이 무엇인가로 인해 굴절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뒤축을 신발에서 간단히 떼어버릴 수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가진 차가운 피는 가장 효과가 빠른 해독제였다.”(453)


우리는 준의 인간성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전쟁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고, 결국 비극은 그녀의 자식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우리는 한인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잘 몰라봤으면 좋겠다. 4살 때부터 미국서 자라고 영어로 소설을 쓰는 그는 한국인이라기보다 미국인일 거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보면, 그 앞에서 감춰질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헥터가 일하는 건물은 (외국에 나와있는) 한인의 것이다. 헥터는 그 건물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건물 주인 정과 건물을 소개한 140-141 페이지의 장황한 내용들은 게으르고 막무가내면서 골프에 죽고 못 사는 어떤 전형적인 타입의 한인 업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냄새나는 화장실뿐 아니라, 건물 자체를 보수하지 않는 복지부동의 한인들,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도 같아 뜨끔했다.  “정은 가려운 부위를 손으로 벅벅 긁고 나서 방귀를 날카롭게 뀌더니 몸을 돌리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140) 이런 묘사는 귀엽기까지 하다. 고아원을 가끔 도와주러 오는 김 목사라는 사람. 그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에는 철저히 관심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태너 목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그들의 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려 애쓴 반면, 가끔 시찰 오는 김 목사는 전형적인 행정 목사의 타입을 보여준다. 할 일을 최소한도로 하는.


고아원의 아이들도 많이 나온다. 목사 부부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그들, 그중에 준이 가장 심했다. 선교사 부인 실비는 상처가 큰 어린애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 사랑에 기대던 아이들은 더 큰 배반감을 맛본다.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의 울분, 결국 준은 목사부부를 따라가지 못할 바에는 죽겠다는 결심으로 불을 지른다. 결국 그 불로 선교사 부부와 희망이 없던 고아까지 죽임을 당한다.


아이들은 영악을 넘어 지나치게 전투적이고, 어른들은 나태하고.. 이창래 작가가 보여주는 한인들의 모습이 이렇다. 물론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한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은 아닐 것이다. 첫 장편소설 “이방인”도 충격적이었지만, “생존자”는 정말로 정신이 한동안 혼미했다. 앞으로 그가 써내야 할 작품들이 기대가 된다. 우리 한국 문단에 "대단한" 작가가 있었다.


이 책은 솔페리노 전투에서 죽어간 유해를 찾아가는 긴 여행을 축으로 구성되었다. 주제는 한마디로 “전쟁”이다. 1870년대부터 전쟁의 참상이 있어왔고, 오늘까지 그 참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전쟁”을 쉽게 잊는 인간의 건망증에 대한 도전으로.


준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그 교회를 갔지만, 교회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유해들로 살벌하게 꾸며진  교회였지만 그녀의 상상 속에선 아름답다. 그렇게 죽어가는 그녀에게 한 장면이 펼쳐진다. 살아남기 위해 동생을 버리고 뛰던 그 전찻길에 대한. 기차를 놓칠까 봐 뒤돌아볼 수 도 없었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그때가.


소설의 원 제목 “항복(The Surrendered)”은 한국어로는 “생존자”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여기에도 무언가 운명적인 것이 있을까? “원주민(Native Speaker)”이 “이방인”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던 것과 같은. 이창래의 책은 한국의 땅에 오면 정반대의 뜻이 된다. 그런데 그 의미는 서로 맞물린다. 한국 사람, 한국 땅이 그렇게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작가는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약간은 비틀린 우리들의 정서를..


어쨌든 “생존자”는 지축을 뒤흔드는 전쟁소설이다. 우리가 전쟁을 죽어라고 피해야 하는 이유들을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다른 것들이 할 수 없는 “문학의 위대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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