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Native Speaker"에 대한 정확한 문자적 이해가 아닌가 싶다. "영원한 이방인"으로 의역되어 나온 이 소설에서 "네이티브 스피커"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이 소설의 뼈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작가와 협의하에 제목이 바뀌었을 것이니 소설 전반적으로 큰 무리가 없는 설정이겠지만, 네이티브 스피커와 영원한 이방인 그 둘 사이에는 흑백과 비등한 대비관계가 보여진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흔히 원어민으로 번역되고,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를 말할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사람을 "네이티브 스피커"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자에 좀더 집중하면 "네이티브 스피커"는 단지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제 엄마로 부터 배운 언어를 말하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고 볼수 있다.
이에 대한 것을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원주민의 아름다운 언어 여남은 가지를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그 어려운 이름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565쪽 소설 마지막 문장)
원문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위에서 말한 "원주민"은 "원어민, native speaker"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너나 나나 그 누구나 네이티브 스피커인 것이다.
처음 소설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영원한 이방인은 네이티브 스피커가 될수 없는 아웃사이더를 말한다. 이런 면에서 이방인과 원어민은 서로 다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작가는 native speaker를 이중적인 의미로 쓴 것 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서 "제나라 언어로 사는 사람들"이란 광역적인 뜻으로 말이다.
이것은 소설의 흐름이기도 하다. 미국인인줄 알다가,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고, 정체성의 혼란을 거쳐서 제나라 말과 영어를 섞어 멋대로 떠들어대는 이민자들의 언어에 호감을 갖게 되는 소설 주인공의 마음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사회에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수밖에 없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렸다는 식으로 이 소설이 간단명료하게 끝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Native Speaker"라는 제목을 포기하고 "영원한 이방인"을 허락했다는 것이 좀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돌고 돌아, 결국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는 "이방인"이 될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제목 자체야 큰 문제가 없겠다. 또한 내 소설 해석에 자의가 많이 포함되기도 했을테고 말이다.
어쨋든 이런 바탕으로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이 책이 세상에 나와 주목을 받았던 그때는 1995년이다. 어떻게 해서 그당시에 이책을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2003년에 재편집되어 나온 책을 나는 2007년쯤 구입하여 또 오랫동안 읽지 않았었다. 소설을 그렇게 내팽개쳐 두지는 않는다. 몇몇 정말 읽기 힘든 책을 제외하고는. 이민초년병이던 그때 읽었다면 이민1세와 2세를 이해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민2세인 우리의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입장으로 읽게 되기도 했다. 마음이 쫄밋거리면서 말이다.
이 소설은 사실, 초반 흡인력이 떨어진다. 생경하다. 번역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뭔가 까칠하다. 그런데 도입부의 이런 것을 조금 견디다 보면, 소설속으로 빠져든다. 아직도 물흐르듯 일사천리로 읽히는 소설의 범주에는 들지 않는다. 그것이 언어를 갈고 다듬어서 생긴 일같다. 스토리에 의존하지 않고, 언어를 박아넣는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헨리 박의 아내 릴리아는 언어치료사이다. 그녀는 언어장애가 있거나, 모국어로 말하다 학교에 가서 영어습득이 늦은 아이들의 혀를 교정시켜주는 교사다. 나는 소설에서 완전한 인간을 찾는 버릇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 완전한 인간은 릴리아다. 불편부당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으며, 오래 참고, 비틀린 문제들을 제 자리로 만드는..
헨리는 이민 2세로 자란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뉴욕에서 청과상을 한다.
"내가 처음 대마초를 피운 뒤에 아버지가 나를 노려보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네 눈이 온통 이끌렸구나(led, 빨갛다는 뜻의 red를 잘 못 발음한 것-옮긴이) 나는 그 말을 듣고 내 방으로 가서 눈물이 나오도록 웃어젖혔다."(387쪽)
L과 R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 소설속에 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이민자로 사는 우리에게 씁쓸함을 준다. 헨리의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그의 가족들 이야기는 부유한 나라에서 일벌레로 살아가는 이민1세들의 치부들이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얻은 한국인은
"너는 동트기 전부터 한밤중까지 일한다. 너는 장사에서 결코 불친절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관대하지도 않다. 가족의 얼굴은 좀처럼 볼 수 없지만, 가족은 너의 인생이다. 돈은 상당한 금액을 작은 단위로 쪼개서 늘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 너는 자존심을 가지고 꾸준히 시장을 독점해야 한다. 너는 셰비(시보레 자동차)를 몰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캐디(캐딜락 자동차), 그 다음에는 벤츠를 몰아야 한다. 너는 주택융자 할부금이나 교회가는 날을 절대 까먹지 말아야 한다. 너는 유일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자본주의의 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93-94쪽)
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나의 비천한 주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미국땅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어머니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할까. 얼마나 나쁜 일이 생기기에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신경을 쓸까 궁금해하던 기억이 난다."(101쪽)
이것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이며, 또하나 이름도 없이 이집에서 살다 죽은 가정부 아줌마의 이야기도 섬뜩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저 아줌마로 불렸던, 우스꽝스런 외모의 가정부는 사회의 이방인인 이들이 자신들의 구역안에서 또다른 이방인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모"로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그들을 대하던 "주인들의 시선"이 그 에피소드에 진하게 반영되어 있어,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다. 유명한 대학교를 나오고, 사설탐정일을 하면서 백인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헨리박은 사건과 사건들을 지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우리의 치부들까지 애정으로 볼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이민2세들의 눈치를 보게되는 우리들은 그런 그가 대견하게 생각된다.
여기서 "사설탐정"이란 말을 흘려들으면 안된다. 그들은 개인의 정보를 캐내어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말하자면 첩보활동같은 것. 그들에 의해 선량한 정의로운 예술가가, 노동운동가가, 학생운동 후원자가 다칠 수도 있다. 그는 존강이라는 한국계 정치가의 정보를 캐내는 일을 맡게된다. 아주 은밀하게 접근해서 그의 측근이 되어 그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정보들을 수집한다. 존강은 가족만 바라보고, 안목을 좁혀살아왔던 예의 한인과 달랐다. 이민자가 꿈꿀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모범적이며,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활력있는 정치가의 표상.
이런 첩보활동이 벌어질 수 있는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을 주목해 볼수 있다. 폴 오스터(Paul Auster)의 뉴욕 3부작이 생각나는 설정이다. 상대방이 모르게 누군가를 감시하는 그의 작품은 마치 미로속을 걷는 것같았다. 수많은 고층빌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바를 훨씬 뛰어넘는, 음모의 세계인 것이 확실하다. 헨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을 하게될지 짐작만 할뿐 알수가 없다. 자신은 그 일만 하면 끝난다. 범죄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개별적이다. 자신이 감당한 그만큼만 죄책감을 느끼면 된다. 피라밋 구도라고 할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핑계"도 자신의 변호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미국사회의 한면이다. 분업이 확실하고, 약간의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그 일의 전모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것. 소모품으로 이용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말이다.
그런 그가 "완전한 여성" 릴리아에게 적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의 별거와 방황이 이를 보여준다. 헨리 박의 아내는 드러내놓고 일하지 않는 남편에게 지친 상태이다. 그들의 강력접착제였던 아들 "밋"도 어린 7살의 나이에 어이없게 죽고만다. 밋의 죽음은 그들의 미국 주류사회 편승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아들의 죽음으로 정체성을 찾게 된다고 볼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렇게 한국가족과 혼합가족, 그리고 미로같은 뉴욕사회가 얽히면서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헨리박은 음모에 의한 존강의 몰락을 옆에서 보면서, 그의 일과도 작별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걸리던 이방인들의 말이 그의 귀를 거슬리지 않게 된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소리를 내는 한인거리를 향수를 갖고 미친듯 돌아다닌다.
"내 귀에 다른 영어의 가락이 들릴 때마다 나는 지금도 속이 조금씩 무너지곤 한다. 도시의 가게앞이나 창문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들 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오랜 탄식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탄식, 심지어 아줌마의 발작적인 웅얼거림, 그녀의 혀에서 순간적으로 만들어 낸 미국식 발명품들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단지 새로운 억양이나 음조가 아니라, 새로온 사람의 마음에 담겨있는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옛 음악으로, 갈망과 희망이 울려퍼지는 음악으로 말을 한다. 존 강은 늘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과 그리고 존강의 몰락까지를 겪어오면서 마침내 이르게 된 도도한 강물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릴리아의 입을 통해 "말하는데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아내 릴리아가 언어교정사로 일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릴리아가 아이들에게 두려움없이 언어와 노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네이티브 스피커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방인인 것을 이제는 즐기기도 한다.
"나는 그녀의 장기손님이다. 나는 영원한 방문객이다. 그녀는 나를 그런대로 좋아하고, 내가 있는 것을 견디어낸다."(562쪽)
사실 그렇다. 누가 원어민이고 아닌가?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원어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서로 방문자로 이 세상을 살아갈뿐이다. 그가 릴리아의 방문자가 되었지만, 릴리아도 그에게 방문자이기도 하다.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규격화된 네이티브 스피커에 끼려고 했던 노력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들이 가진 균열도 확인하고, 모두가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문화의 결대로 그렇게 내 몸이 이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