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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Dec 18. 2020

천국의 열쇠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성직자, 특히 사제(가톨릭 신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겐 필독서라는 "천국의 열쇠"를 읽었다.


우선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그들을 한번 불러보자. 어쩌면 소설의 윤곽도 그 인물들을 통해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랜치스 치셤 부모...

주인공의 아버지 알렉스 치셤. 건장한 어부인 그는 존경받는 마을의 유지로 아들과 아내를 사랑한다. 어머니는 음식을 잘만들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로 남편을 믿고 따른다. 기독교 집안인 엘리자베쓰는 가톨릭 교인인 남편과 눈이 맞아 연애로 결혼한다. 흔히 부부가 종교가 다르면 불행할 것이라는 우려를 딛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 가톨릭 박해가 이뤄지고 있던 이웃 마을에 갔다가 알렉스는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이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서, 부상당한 그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도중, 급류에 휩쓸려 모두 죽음을 당한다.


치셤은 부모를 통해 한가지 의문을 갖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만 해도 같은 종파는 아니다. 그런데도 서로 존경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아주 선한 사람이다. 그보다 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 아버지를 사람들은 해치려고 하는 것일까? 갑자기 심장 한가운데를 예리한 칼이 찌르기라도 한듯이 그는 "종교"라는 말에 몸이 움추러드는 것을 느꼈다. 같은 하나님을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예배한다고 해서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수수께끼였다. (27쪽)"


치셤은 나중에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할때 개신교 계열의 목사 부부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데, 치셤의 종교관의 한 반영이라 볼 수 있겠다.


폴리 아주머니..

먼 친척이 되는 폴리 아주머니는 치셤을 어릴때부터 도와준다. 9살때 부모를 잃고 외가집에서 온갖 고생을 하던 치셤을 건져내와 키워주고 신학교를 보내 신부의 길을 걷게 한다. 또한 부인과 사별한 오빠와 함께 있으면서 부모를 잃은 올케 오빠의 딸 노라를 돌봐주기도 한다. 그녀는 오라비 네드가 거의 폐인이 되어 어려울때도 성심을 다해 간호하고, 노라와 노라가 낳은 딸, 그리고 프랜치스에게 헌신적인 희생을 했다. 프랜치스는 폴리 아주머니를 "성녀"와 가까운 삶을 산다고 표현했다.


네드..

사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했던 노라의 친척. 그는 아내와 사별하고 누이동생 폴리와 함께 지낸다. 사별한 아내의 오빠가 낳은 자식인 노라를 극진히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넘쳐 자식같은 노라에게 임신을 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책에서는 "노골적으로는 단 한줄도 표현되지 않았지만" 노라의 임신은 네드의 소행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혈연은 아니지만 가까운 아저씨에게 당한 수치감에 시달린다. 비밀리에 아이를 낳고 주변의 압력으로 한심한 인간에게 결혼하기로 한 전날, 기차에서 추락사하고 만다. 노라가 낳은 아이 주디는 그후 폴리 아줌마가 돌보게 된다.


노라.. 프랜치스와 또다른 소년 안셀모와 어릴 적 친구다. 소녀가 되면서부터는 프랜치스에게 마음을 준다. "-네 모순 덩어리의 성격이 자라는 것을 나는 숨을 죽여가며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너의 약삭빠르고, 수줍어 하고 그러면서도 대담하고, 예민하고, 약간은 건방져 보이는 명랑함이나 천진난만함, 그 모든 것을 좋아하고 있다. ..."(96쪽)


프랜치스가 노라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토막이다. 프랜치스가 성직자가 되는 것의 가장 큰 방해물이 있다면 노라를 마음속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치셤을 혼란하게 했던 노라의 그 자유분방함이 결국엔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온다.  자신을 돌봐주는 아저씨에 의한 성추행 사건은 네드와 노라의 급속한 추락을 가져오고,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정욕이 파생하는 결국을 보여주는 것 같다. 노라가 낳은 딸 주디는 도벽이 있는 소녀로 여러사람을 괴롭히더니, 그녀 또한 의미없는 결혼으로 자식을 낳고 죽는다. 대를 이은 불행, 주디가 낳은 아들을 선교지에서 돌아온 노인이 다된 치셤신부가 돌봐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질긴 인간의 인연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하지 않고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안셀모..

프랜치스와 같은 신학교를 다닌 모범신앙인이자 성공적인 사제인 안셀모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능한 사제의 길을 닦아나간다. 어렸을때부터 신부가 되기로 작정한 안셀모는 어디서나 칭찬듣는 겸손(한척)이 몸에 배였다. 그리고 치셤이 해외에서 고생할때 안셀모는 착실한 승진을 하여 주교의 자리에 까지 올라 치셤의 인사권을 쥐고 흔들 정도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겉만 반지르르한 종교행정가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탈록..

치셤의 오래된 친구로 무신론자인 의사이다. 그러나 중국에 흑사병이 돌고 있을때 치셤을 도우러 중국에 온다. 그는 부친의 영향으로 죽을때까지 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온몸으로 성심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 "몹시 겸손하고 자기 지성의 한계를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에는 이상하게 적극적인 데가 있다"고 책에서는 그를 묘사하고 있다.


피스크 개신교 목사 부부.. 치셤목사가 사역하는 곳으로 선교하러온 개신교 장로교 목사 부부. 결혼후 20여년간 중국에서만 사역한 그들은 치셤신부와 반목하지 않고 우정을 나눈다. 치셤신부는 그들과의 우정을 통해 "선의와 관용" 이 두가지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피스크 목사는 귀향을 앞두고 도적떼에게 잡혀 생고생을 하다 죽음을 당한다. 특별히 그 부인은 험악한 상황에서도 신앙에 의지해 남편과 신부를 보좌한다.


치셤..

사랑하는 노라의 죽음 이후, 사제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다. 신학교에서도 몇가지 반항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교리와 규칙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내부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것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학장은  "더군다나 치셤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지. 그는 딴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단 말야. 그에게는 일종의 심연과 불이 있소. 감수성이 강하고 우울증의 경향도 있소. 그것을 저 바보같은 장난과 익살속에 감추고 있거든. 아무튼 녀석은 대단한 투사라서 절대로 굴복하진 않을 거요.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지녔으면서도, 진실로 고집으로 이론적이라는 기묘한 성질이 뒤섞인 거란 말이요. 또 거기에다 특히 철저한 개인주의자니까..." 이렇게 좋은 뜻으로 해석하지만, 대부분의 동료와 스승사제들로부터 적대당한다.


그의 보좌신부 시절도, 꽉 막힌 주임신부와의 갈등이 있었고, 친구인 안셀모와 함께 보낸 보좌신부의 생활도 여러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제의 길은 평탄치 않아서 결국 중국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곳에서 전임신부가 "돈"으로 "교인"을 샀던 문제에 울분을 품고, 오로지 두손만 의지하여 선교를 했으니 그 고생이 막심하였다. 1930년대의 중국은 기근과 재난으로 얼룩진 때였다. 흑사병도 돌고, 산적들도 들끓고. 그는 그런 곳에서 자기몸을 돌보지 않고, 주민들과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처음에는 거렁벵이같은 치셤신부를 무시했던 베로니카 수녀는 자신의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분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단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용기를 지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은 그 용기를 무언 중에 실천에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친구이던 의사가 돌아가셨을때 그분은 병균이 우글거리는 덩어리 피를 토해내는 친구를 팔에 안은 채 그 핏덩어리가 빰에까지 와 닿아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다른 종파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다는 것에 대해, 치셤신부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해서 천국에 들어가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그 다른 편의 문을 택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분들이 자기의 믿음과 길을 따라 신앙과 자선을 베풀 권리를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한다.


그의 설교나 행위에서 보면 위와 같은 사상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즉 신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등-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온 세계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할때가 아니겠는가. 세계는 살아서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건강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의 인간이라는 세포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니, 그 하나하나인 작은 세포인 인간의 마음들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것이다.(198쪽, 하편)


중국의 큰 사업가이며 오랜 친구인 챠씨는 "신부님 전에도 말씀드렸죠.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이제야 당신의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이상한 소망을 갖게 된 모양입니다.... 신부님, 당신은 모범을 보임으로써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만, 신부가 고결하여 그 신부가 가는 길로 간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신부가 감동으로 마음이 젖을 만하다. 치셤신부도 베로니카 수녀와의 대화에서 그의 친구 탈록의 죽음을 놓고 그는 천국에 갔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렇습니다. 불교도이든 회교도이든, 도교의 신봉자이든 또한 선교사를 죽여 그 사람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무지한 식인종도... 스스로가 돌아보아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겁니다. 그게 신의 넓으신 자비라는 것입니다."


자, 이상과 같은 여러 인물들과 치셤신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리되는 것이 있다면 두가지인 것 같다.


1) 불행한 인생에 대하여.


치셤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놓고 어이없게 죽었다.  그리고 네드의 불건전한 욕망이 노라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네드도 결국 폐인이 된다. 노라의 딸은 도벽을 지닌, 문제아로 그리고 그 문제아가 낳은 아들은 치셤에게 계속 가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인생을 잘 설명한 글이 본문에 나온다.

"가만히 생각하면 주디의 모순투성이일뿐 조금도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생애에는 시종 어두운 운명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 죄라는 말을 나는 아주 싫어하고 믿지도 않지만, 단지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세상에 왔다가 가버린 느낌인 것이다. 그녀는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어두운 약점의 다른 증거였다. 그리고 그와 또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슬픔을 지닌 인간의 비극은 영원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속속히 살펴보노라면, 인간세상을 굴리는 하나님의 손을 걷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2)천국에 이르는 길.


책의 제목이 "천국의 열쇠"이지만, "천국의 문"이라고 해야 조금 더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흔히 산을 정복하는 많은 길이 있음을 들어, 정상(구원)에 이르는 길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종교다원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 책도 그런 선상에 놓여있는 듯 싶다.


한편으론 이런 사상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에큐메니칼 운동(교회일치운동)이라 하여 한 조류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교회일치운동의 역사는 꽤 되며 현재까지도 이 사상은 달콤하다. "한길"보다는 "여러길"이 "좁은 문"보다는 "넓은 문"이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으랴.


천국이니, 구원이니는 사실 인간이 거론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흔히 말하는 어떤 종파안에 들면 구원의 보장을 받는다는 것은 없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에게까지 구원이 확장되는 것 또한 말이 안되는 것일 게다. 에큐메니칼운동이 기독교 내부의 종파의 일치에서 다종교 일치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각 종교를 한 곳에 진열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여럿이며 구원의 모양도 각각 다를 것이다. "일치, 화합, 포용" 등의 좋은 뜻을 내세워, 황당한 종교비빔주의를 만든 것이다.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고싶은 인간의 욕망이 종교를 만들어냈고, 이런 사상이 힘을 얻는다.


사적인 욕심 없이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 한 치셤신부 처럼, 사지에서 온몸을 바쳐 희생한 개신교 목사부부같이, 흑사병 치료하다 그 병에 걸려 죽은 탈록같은 삶을 누구나가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은 폴리 아주머니같이 성자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살 수도 없다. 그들은 소설속 인물이므로 천국에 가지도 않았다.^^ 치셤목사가 말한 대로 자기를 돌아보아 한점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천국의 문이 열리나. 내가 배운 바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자에게만 열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 확신은 확실한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논의를 더욱 자제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의 줄기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신앙적 도움을 기대했던 것에는 못미쳤다.  작가 A.J.크로닌은 의사출신 소설가이다. 그는 종파간의 불신을 치유하고, 넉넉한 이웃사랑으로 세계평화를 이뤄야한다는 소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이 주는 것의 한계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뒷배경에 세워져있고, 인간들의 활동만 그렸다. 가슴떨리며 시작했던 책읽기가, "교양서적" 한권 읽은 것으로 끝난 것같아 허무하다. 그러나 크로닌의 인간에 대한 통찰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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